6학년 여름방학 때 초경을 시작했다. 이후 한 번을 거르지 않고 매달 꼬박꼬박 월경을 한다. 주기가 짧아지면 한 달에 시작일이 두 번일 때도 있다. 지긋지긋한 생리, 언제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까.면역력이 떨어져 생리대가 닿는 부위에 발진이 생겼다. 못해도 한 달에 7일을 생리대나 팬티라이너와 한 몸이 되어 살아야 하는데 피부 발진이라니 곤욕이다. 급한대로 면생리대를 이용해보았지만 불편감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출산 전에는 생리통으로 힘들 때가 많았는데 생리통이 없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생리대로 인한 불쾌감은 사
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우리 동네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사람들이 벗어놓은 신발들이 입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초행길인 우리 가족은 신발을 손에 쥐고 맨발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험해 발바닥이 아프면 다시 신을 요량이었다. 작은 몸을 건사하며 한 걸음씩 대담하게 내딛는 딸들이 대견했다.흙이 단단하게 다져진 구간이 있는가 하면 찰흙처럼 쫀득한 구간도 있고 진창처럼 질퍽하고 미끄러운 구간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길이 형성되었을까. 그동안 이곳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의문을 품고 사람들이 오르는 길을 따라 걸
아이들의 다리가 새까맣게 탔다. 바지를 입은 곳과 햇볕에 노출된 곳 사이에 선명한 경계가 생겼다. 선크림을 바르고 선스프레이를 뿌려도 태양의 위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목을 덮는 모자와 래쉬가드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의 목 뒤와 팔만은 지켰다.꽃 달린 수영모와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놀던 시절에는 일광화상을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늘 없는 야외 수영장이나 바다에서 종일 놀다 벌겋게 타버린 얼굴과 팔은 물놀이가 끝난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끈거리는 열감을 줄이려 오이를 잘라 붙이고 얼음찜질을 하지만 며칠 뒤 허물 같은 하얀
KBS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에 따르면 패스트패션이 유행하면서 매년 1000억 벌의 옷이 쏟아져 나오고 330억 벌의 옷이 버려진다고 한다. 우리가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옷들이 어딘가에서는 쓰레기 산이 되고 어딘가에서는 쓰레기 강이 되어 흐른다. 그동안 헌 옷 수거함에 옷을 넣으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다. 오히려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실체는 그게 아니었다.헌 옷이 국내에서 재활용되는 비율은 겨우 5%, 나머지 95%가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되며 그중 4
둘째가 생긴 이래로 아이들과 떨어져 밤을 보내는 건 처음이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1박 2일의 힐링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육아휴직이 마음의 부담을 덜어줬다. 아침에 두 아이를 학교와 유치원에 차례로 보내고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대운산 깊은 산자락에 넓고 정갈한 힐링 체험관이 있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체험복을 받아들고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우르르 이동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사물함에 짐을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해병대 캠프도 아니고 도착하자마자 쉴 새도 없이 단체로 환복을 하는 상황이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 어떤 내용일지 제목부터 궁금증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저자가 소방관인 것은 아니고, 소방서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던 요리사 강제규님이다. 이모님 부재시 경력을 살려 한 끼의 식사를 준비했던 그의 경험들이 담겨 있다.안전센터에 요리를 담당하시는 이모님이 계시다는 점이 신기했는데, 한 끼에 쓸 수 있는 예산은 또 너무 적어서 안타까웠다. 그래도 고기가 빠지는 날은 없다는 게 재미있다. 언제 출동이 일어날지 모를 곳에서 얼마나 힘든 일을 해야 할지 모르며 늘 비
오늘은 감자를 수확하는 날~ 시부모님이 감자를 심고 수확 전까지 관리를 해주시면 다 차려진 식탁에 숟가락 얹고 축제를 즐기는 건 자녀들의 몫이다. 시누네는 과일과 과자 준비, 우리는 백숙용 토종닭과 떡 준비, 손녀들은 감자 캐기 체험에 직접 투입! 손발이 척척, 아귀가 꼭꼭 맞다.크지 않은 텃밭에 감자가 네 고랑이다. 친구네 목장에서 남편이 얻어온 쇠똥을 아낌없이 뿌린 시부모님. 거름으로 비옥해진 땅에서 감자의 씨알이 얼마나 여물었을까? 기대되는 순간이다. 감자 캘 준비가 된 아이들이 호미를 챙겨 밭으로 들어간다.감자 캐기 시작!1
기다리던 여름이다.달콤한 과일이 풍성한 계절 여름!시원한 음식이 당기는 계절 여름!해가 길어 빨리 눈 떠지고 늦게까지 놀기 좋은 계절 여름!풍덩 물에 뛰어들고 싶은 계절 여름!녹음이 그늘을 내어주는 계절 여름!라디오를 들으며 출근하던 날 아침,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에선 제철 과일이란 개념 없이 사시사철 모든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영국의 과일 수급 상황에 귀가 솔깃했으나 그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수박을 먹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딸들을 위해 지난 겨울과 봄, 큰맘 먹고 수박을
햇볕이 너무 뜨거워 응달로, 카페로 대피를 했던 어제와 다르게 놀기 딱 좋은 날씨다. 점점 더워지는 5월의 기온을 한 템포 늦춰주는 구름이 고맙다. 내일은 비가 예보되어 있다. 비가 오기 전의 찹찹한 대기, 적당한 기온과 시원한 바람, 오늘은 놀기 딱 좋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늘어지는 몸과 마음을 다잡아 달려간 산골에 우리 가족의 아지트가 있다. 조명을 밝힌 듯 붉고 화사한 장미, 초록 담쟁이 넝쿨과 잔디, 푸릇푸릇한 텃밭의 푸성귀, 화단에 자리한 다양한 꽃과 나무들, 겨우 6평 농막이지만 우리에게는 별장과도 같은 곳, 시부모
“간호의 꽃은 임상이다. 임상에서 최소한 5년은 근무해라.”학부생일 때 간호학과 교수님들이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임상에서의 경험과 경력이 중요하기 때문인지, 5년이 되기 전에 임상을 그만두는 간호사가 많아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교수님들은 미국 간호사[NCLEX-RN]도 장려했다. 미국은 한국보다 급여가 높을 뿐 아니라 대우도 좋고 담당 환자 수도 적다고 했다.굴지의 대학병원에 입사했으나 5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4년 9개월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가장 큰 이유는 간호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업무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압박감에 시달린
언니 다은이가 유치원에 다니고 동생 다연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기, 둘은 같은 장소로 숲 체험을 갔다가 마주치게 되었고 너무 반가워서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겨우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을 때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고 다은이와 다연이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헤어지기 싫어 흘리는 눈물이었다.이 일화는 아직도 둘 사이에 회자 되는 것으로, 추억을 공유하는 그들에게선 동질감 내지는 묘한 연대감의 기류가 느껴진다. 자매, 그들은 과연 가깝고 좋은 관계일까?상담 결과 다은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동생, 가장 싫어하는 사람
다이어트, 성형수술, 피부관리, 치아교정, 화장, 액세서리, 써클렌즈, ... 남들 눈에 잘 보이기 위한(혹은 자기만족을 위한) 욕심에는 끝이 없다. 설령 나이가 아주 많거나 어리다 하더라도.6세 다연이는 빨간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어 했고 9세 다은이는 아침에 새하얀 토끼 머리핀을 앞머리에 장식한 채 등교했다. 나는 피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점심식사 후 콜라겐 젤리를 먹었고 남편은 살을 빼겠다며 점심식사를 건너뛰었다. 남들 눈에 잘 보이고 싶어서건 자기만족을 위해서건 외모에 신경을 쓰고 관리하려 애쓰는 게 우리
타고난 시력 금수저였다. 주변에서 안경이냐 렌즈냐 고민할 때도, 라식수술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할 때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딱 한 번 시력 저하를 겪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고입 시험을 준비하며 학교에서 매일 9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1997년, 갑자기 칠판 글씨가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찌푸리면 선명했지만 눈이 조금만 피로해져도 흐릿한 글자가 여러 겹으로 보였고 그럴수록 더욱 눈이 피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상함을 느끼고 안경점에 갔을 땐 이미 시력이 떨어진 뒤였다. 한쪽 눈은 0.6, 반대쪽 눈은 0.
생소한 단어를 접한 아이들은 재미있는 말실수를 거치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낸다. 양면테이프를 ‘양념테이프’로, 방과후선생님을 ‘반가워선생님’으로, 완두콩을 ‘만두콩’으로, 방패를 ‘방태’로 말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완벽히 그 단어들을 구사한다.9세 다은이와 6세 다연이가 최근에 한 귀여운 말실수는 다음과 같다.#개나리춤나는 운동을 못 한다. 춤도 못 춘다. 유연성도 제로다.그런 나도 자신있게 추는 춤이 있으니 그건 바로 개다리춤이다.양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오므렸다 흔들어대며 박수도 한 번씩 탁!유치원에서 돌아온 다연이가 나에게
꽃이 한가득 그려진 치마 사진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봄에 입으면 기운이 한껏 샘솟을 것 같은 화사한 치마였다. 사진 한 장으로 무릇 봄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낮에 들른 식당의 마당 한쪽에 샛노란 꽃이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고즈넉한 한옥과 대비되는, 쨍하게 눈에 띄는 꽃이었다. 이름 모를 그 꽃은 ‘봄의 전령 복수초’라고 했다.내 경험으로 미루었을 때 봄의 전령은 매화다. 겨울이 가시기도 전에 화단에서 가장 먼저 피는 매화는 옷을 여미는 날씨 속에서도 봄기운을 감지하는 신기한 꽃이다. 먼저 꽃피우지 않고는 못 배기
할아버지는 소여물로 줄 짚을 썰다가 검지손가락 첫마디를 잃었다. 할아버지의 손가락을 날려버린 것은 ‘작두’라고 들었다. 작두의 거대한 칼날 앞에서 사람의 손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였을 것이다.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며 경운기를 몰다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조금씩 절기 시작했다.신체의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것을 장애라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분의 신체가 정상은 아니었으므로 어찌 보면 그것은 넓은 의미의 신체적 장애였다.그렇다면 정상이란 무엇일까? 겉보기에는
친구들과 바다가 있는 마을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그 자리에는 10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도 있었다. 배 불리 먹고 마시느라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으나 나는 20대가 아니었다. 잠이 부족해지자 피부가 푸석푸석, 온몸에 피로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때 10년 만에 만난 친구가 살포시 제안을 해왔다. ‘정기예금이 만기가 되어 어제 이자가 들어왔다. 받은 이자는 기분 좋게 써야 하니 타이마사지를 받지 않겠냐’는 거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호의를 덥석 잡았다. 그날의 마사지는 넝쿨째 굴러온 피로 회복제였다.모
언니를 동경하는 다연이는 언니의 소유라면 모두 좋아보이는 마법에 걸린 것 같다. 언니가 가진 물건뿐만 아니라 다니는 학교나 심지어 이름까지도 다연이 눈에는 최고로 보인다.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다연이가 선언했다.“이제부터 내 이름은 김다은이야.”그러면서 같은 반 친구 몇 명도 언니의 것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언니의 이름까지도 부러운 이 꼬마 숙녀들을 어쩌면 좋을까.그 말을 들은 다은이가 펄펄 뛰었다.“야! 그건 내 이름이야!”몇 번을 더 우기다 대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연이가 고심 끝에 ‘김다흔’이라고 이름
특별한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 소중함을 간과하기가 쉽다. 한시도 빠짐없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처럼.에픽테토스는 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네가 사랑하는 건 필멸이고, 너의 것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지금 잠시 너에게 주어졌을 뿐, 제철에 나는 무화과나 포도처럼 되돌릴 수도 없고, 영원하지도 않다.”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기술(데런 브라운) 중에서-교육기관의 돌봄 기능과 급식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방학 때마다 혹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이후에도 그것이 중단되는 휴일마다 반복적으로
고향 집 뒷산에는 대나무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할아버지에겐 쏠쏠한 돈벌이 장소, 다 큰 언니오빠들에겐 귀찮은 심부름터, 어린 나에겐 놀이터가 되어주던 대나무숲이었다.일본의 지진 관련 소식을 들을 때마다 대나무숲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대나무는 얽히고 설킨 뿌리를 대지에 깊고 단단히 뻗기 때문에 지진에 강하다고 했다. 반면 아까시나무는 뿌리가 땅 표면을 따라 뻗어나가기 때문에 흙을 갉아먹는다고 했다. 2016년 9월에 강도 높은 지진이 내 고향 경주에서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진이 와도 대나무밭으로 뛰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