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139

고향 집 뒷산에는 대나무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할아버지에겐 쏠쏠한 돈벌이 장소, 다 큰 언니오빠들에겐 귀찮은 심부름터, 어린 나에겐 놀이터가 되어주던 대나무숲이었다.

일본의 지진 관련 소식을 들을 때마다 대나무숲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대나무는 얽히고 설킨 뿌리를 대지에 깊고 단단히 뻗기 때문에 지진에 강하다고 했다. 반면 아까시나무는 뿌리가 땅 표면을 따라 뻗어나가기 때문에 흙을 갉아먹는다고 했다. 20169월에 강도 높은 지진이 내 고향 경주에서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진이 와도 대나무밭으로 뛰어가면 된다는 생각은 어린 마음을 안심시켰다.

할아버지는 대나무를 이용해 커다란 대빗자루를 만들었다. 우리 형제들은 할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잔일을 도왔다. 그러다 의외의 놀이를 발견하기도 했다. 대나무를 자르면 속에 비닐처럼 얇고 하얀 속껍질이 있는데, 그것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떼어 내 공기가 든 상태로 펑 터트리는 놀이였다. 세심함이 요구되는 단순한 놀이가 퍽 즐거웠다.

봄이면 죽순이 우후죽순으로 자랐다. 다만 그걸 눈여겨본 기억은 없다. 중식을 먹을 때마다 등장하는 귀한 죽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이유는 우리 가족이 죽순을 즐겨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좀 아깝기도 한데, 그 신선한 죽순들이 강한 대나무로 자라났으리라 생각하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함박눈이 내린 후의 겨울 대나무숲은 평소와 다른 매력을 뿜어냈다. 가늘고 긴 초록 나무와 대비되는 눈부시게 하얀 눈, 나무가 흔들릴 때 잎끼리 스치는 소리와 더불어 눈이 사라락 떨어지는 소리의 조화, 그 속에는 하얀 토끼가 뛰어다닐 것만 같은 동화 같은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비록 토끼 대신 나 같은 어린아이들이 나무 사이를 촐랑촐랑 뛰어다녔지만.

오랜 시간 기거하던 한옥을 뭉개고 뒷마당이 있던 자리에 벽돌집을 새로 지었다. 집과 대나무숲의 거리가 가까워진 뒤부터 집안에 지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초는 침대에서 사촌들과 이야기를 하던 저녁이었다. 대화 중에 발목이 따끔해 의심 없이 발목을 살짝 쓰다듬었는데 잠시 후에 무릎이 따끔한 느낌이 다시 들었다. 그제야 이불을 들추어 보았는데 무릎에 뭔가가 붙어있었다. 몸서리치며 손으로 벌레를 털어 내고 보니 그것은 새끼 지네였다. 그 작은 것을 보고도 기겁을 했는데 그날 이후 집안에는 어른 손가락만큼 크고 시커먼 지네가 이따금 출현했다.

독을 가진 생명체라 무섭기도 했지만 두려움보다는 혐오감이 컸다. 발이 많은 절지동물 특휴의 외형과 움직임이 징그럽고 혐오스러웠다. 지네는 벽에 기대고 있던 형부의 등을 물기도 했고 한밤중에 주무시던 아버지의 얼굴과 행주를 집어 들던 어머니의 손을 물기도 했다. 지네에 물린 가족들은 처음에는 물린 부위가 붓고 따갑다가, 부종이 가라앉은 후에는 가려움과 함께 주변 껍질이 허물처럼 벗겨진다고 했다.

지네의 상극이 닭이라는 말에 마당에 닭을 키우기도 했으나 지네를 없애는 특효는 지네 퇴치제였다. 지네가 뻐드러질 정도니 사람에게도 가히 이로울 리 없을 테지만 지네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아직도 어머니는 지네가 자주 나타나는 철에 그 약을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구석에 뿌린다고 하신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대나무를 현재의 거주지인 울산에서 자주 보게 된다. 십리대밭이라는 명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동네 곳곳에도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나무를 생각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잎 소리가 환청처럼 그려진다. 살랑살랑 가볍고도 시원한 소리가 머릿속을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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