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150

환자, 보호자, 내원객들의 소망이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환자, 보호자, 내원객들의 소망이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간호의 꽃은 임상이다. 임상에서 최소한 5년은 근무해라.”

학부생일 때 간호학과 교수님들이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임상에서의 경험과 경력이 중요하기 때문인지, 5년이 되기 전에 임상을 그만두는 간호사가 많아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교수님들은 미국 간호사[NCLEX-RN]도 장려했다. 미국은 한국보다 급여가 높을 뿐 아니라 대우도 좋고 담당 환자 수도 적다고 했다.

굴지의 대학병원에 입사했으나 5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49개월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가장 큰 이유는 간호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업무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압박감에 시달린 나머지 교수님들의 당부와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결정을 내렸다.

나도 인간답게 살고 싶어.”

퇴사를 말리는 가족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내가 근무한 병원은 급여와 복지가 좋은 편이었다. 대신 환자의 중증도가 높았고 과도한 업무량과 업무강도가 뒤따랐다. 정해진 시간마다 해야 할 업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하나를 겨우 해내면 다음 해야 할 일이 턱 밑까지 다가왔다. 업무에 허덕이다 퇴근 시간이 지나 차팅을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화장실이 급해도 마음이 조급해 참고 참는 경우가 많았다. 허겁지겁 식사를 할 때가 많았고 업무를 처리하느라 자발적으로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 5년 이상 근무한 간호사는 독한사람이라고 동기들과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를 했다.

간호사에게 배정된 담당 환자 수가 많아 사정이나 처치를 꼼꼼히 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업무 대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최소한의 간호 제공만으로도 걸음은 언제나 빨랐고 대부분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출근할 때와는 달리 화장이 지워져 번들거리는 얼굴로 퇴근을 맞이했고 근무 전이나 후에는 각성을 위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언젠가는 병동에 들어가는 게 두려워 갱의실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었다. 연차가 쌓이면서 근무에 대한 압박감은 조금씩 줄었지만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휴일에도 다음 근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가끔 올가미처럼 숨통을 조여오기도 했다.

지방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친구는 본인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환자들의 중증도는 낮지만 담당 환자 수가 더 많으며 간호조무사, 이송직원 등 타직종이 해야 할 일까지 간호사가 모두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급여도 낮아 자존감마저 떨어진다고 했다. 병원이 힘든 건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였다.

동기, 선후배들과 서로를 의지하며 1년 차, 3년 차 고비를 넘겼다. 5년 차 고비가 다시 찾아왔을 때, 지금 이곳을 평생직장으로 삼느냐, 새로운 일에 도전하느냐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는 예감이 들었다. 고민을 거듭하며 깨달은 것은 좋은 직장이나 연봉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직서를 제출했다.

첫 직장에서 간호 지식과 기술, 다양한 사례, 동료와의 팀워크, 시간관념, 인내심 등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외 부수적인 것들도 남았다. 이를테면 허리 디스크 탈출, 어깨 염증, 치핵, 하지정맥류, 급성 위염, 병원에서 허덕이는 악몽, 그리고 약간의 금전.

같은 병동에 배정받은 동기 5명 중 지금까지 병원에 남아있는 동기는 2명이다. 40%가 병원에 남았고 60%는 병원을 떠났다. 남은 동기는 이제 18년 차 숙련된 간호사가 되었다. 먼저 임상을 떠난 우리 대신 병원에 남아줘서, 환자 곁을 오랫동안 지켜줘서 감사한 마음이다.

힘든 팬데믹의 최전선을 지나온 그들이 조금 더 개선된 환경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근무할 수 있기를 오랜 동료이자 국민의 일원으로 기원한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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