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돌이키니 필자 세대는 정말 운이 좋았다. 우선 한국전쟁 한참 후에 태어나 전쟁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 배고픔도 모르는 세대이다. 가공 식품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초등학교에 다녔다. 장난감도 많았다. 조립식(프라모델) 장난감이 유행하였는데 물가가 낮을 때라 100원짜리도 있었다. 생각과 행동도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졌다. 흔히들 X세대라 하여 기성세대들에게 반발할 수 있었고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N세대에도 살짝 걸쳐 컴퓨터 통신을 본격적으로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청년 세대들처럼 경쟁이 심한 시기도 아니었
충청남도교육청서부평생교육원(원장 최용신)에서는 지난 1일, 6월 주제 도서를 전시중이라고 전했다.이번 6월 주제 도서는 현충일, 6‧25 한국전쟁, 6‧29 제2연평해전이 모두 일어난 6월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달인 호국보훈의 달을 기념하기 위하여 “잊지 말아야 할 역사: 6‧25전쟁 관련 도서”를 선정하여 전시한다고 전했다.서부평생교육원에서 상설로 진행되는 ‘주제도서 전시’는 사서들이 매월 다른 주제를 정해 문헌정보동 1층 로비에 도서를 전시하는 것으로, 독서에 대한 시민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도서관 이용을 활성화
5. 제5대 국회 (1960.07.29~1963.12.16)제3차 개헌(내각책임제 개헌) 이후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총선거는 민·참의원 동시선거로 민의원 233명, 참의원 58명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1952년 제1차 개헌(발췌개헌)을 통해 입법화된 후 한국전쟁과 자유당의 장기집권 등으로 인해 한 번도 구성되지 못했던 양원제 국회가 비로소 구성되었다.민주당이 선거에서 민의원 전체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로 하는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60년 11월 29일 국회는 3·15
1. 제헌국회(1948.05.31.~1950.05.30.)광복을 맞은 지 3년 만에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 총선거가 1948년 5월 10일 실시되었다. 좌익의 치열한 선거방해 공작과 김구·김규식 등 민족주의 진영의 선거 불참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95.5%가 투표에 참가했다.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임기 2년의 198명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제주도에서는 1년 후에 2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총선 열흘 뒤인 5월 20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폐원되었으며, 1948년 5월 31일에는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에 다섯 번씩이나 아버지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지요. 부친이 돌아가신 69년 만에 이번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그나마 피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었습니다.”지난 8월 15일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의 명예를 뒤 찾은 서산 해미출신 故 유한종 선생의 여섯 째 아들인 유승웅 씨는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눈가에 맺히는 눈물로 대신했다.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 출신인 독립운동가 고 유한종 선생은 서산시 해미면 공립보통학교 학생 신분으로 일제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1950년 경인년 한국전쟁 발발 10년 후 1960년 5월 제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발족하여 조사한 결과 전국에서 114만 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 되었고, 이는 남한 인구의 5%에 해당하는 숫자였다.조사 보고서 내용에는 군경 및 기타에 의하여 어린이와 유부녀 학살과 강간, 그리고 재산을 착취하는 등 목불인견의 만행을 자행하였다고 명시 되어있다.이에 내무, 법무, 국방의 삼부 장관을 위원회에 출석케 하였고, 양민학살사건 사후대책을 위하여 행정부에 이관하여 장시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한 실정을 조사, 건의안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희생자가 묻혔다는 서산시 메지골을 찾았다.1950년 7월 초 이곳에서는 이유도 모른채 400~500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했다.
#1. 논 물꼬 문제로 다툰 사람, 빨갱이로 몰아“3일 내내 메지골 깊은 골짜기에 버려진 시신 속에서 남편을 찾아 헤맸습니다. 연일 장마비는 내리고...피범벅이와 이미 부패로 불어 오른 시신 속에서 얼굴로는 찾을 수 없어 (신랑이)잡혀 가실 때 입혀 드린 명주바지와 저고리를 찾아 헤맸죠. 내 손으로 직접 지은 바늘 땀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당시 29살 젊은 나이에 신랑을 잃은 어머니는 메지골 그날의 악몽을 전해주셨다. - 황찬순 70세, 아버지 황덕수“당시 부친은 마을에서 반장인가 이장을
본지는 4월 22일 공정보도위원회를 열고 제198호 신문에 대한 평가회의를 진행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논의됐다. 1. 제198호에서 『충청남도 종합감사로 본 서산시 행정』 제3회차 보도로 그 끝을 맺었다. 기사 내용의 선택과 집중과 분석이 돋보이는 기사였음에도 독자들의 관심이 높지 않았다. 이는 무게감 있는 기사의 보도방식에 대해 고려를 해봐야 할 점으로 분량의 조절, 지나친 전문성의 탈피, 보도에 있어 SNS 연동 등도 연구해야 할 숙제로 남는다.2. 봄철 신학기를 맞아 홍역 및 독감 등 감염병이 극성을 보이고
【뉴스초??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69주기 추모제 서산 지역 2000여 희생되신 영령님들의 억울함을 해원하고 안식을 추모하는 ‘제3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합동추모제’가 14일 서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회장 정명호)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2300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서산유족 회원들은 “69년이 흘렀습니다. 못나고 못난 후손들. 침묵과 굴종의 세월 넘어 이제야 세 번째 술 한 잔 올리나이다. 제삿날은커녕 시신도 찾지 못한 불효를 어찌하오리까”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안식은 언제쯤 이루어질까?제3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합동추모제가 14일 서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추모제에서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2300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추모제 내내 눈시울이 붉어진 유족 회원들은 “제삿날은커녕 시신도 찾지 못한 불효를 어찌 하오리까”라며 흐르는 눈물을 가렸다.영문도 모른 채 대전골령골, 메지골, 양대리, 교통호 등 30여 곳으로 끌려가 억울하게 희생되어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2,000여 희생자들. 지금 이들이
한서대 초청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International Committee of Red Cross) 요르고스 요르간타스(Georgios Georgantas) 한국사무소 대표 특별 강연회가 4월 3일 한서대 연암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국제적십자위원회의 인도주의 활동”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요르간타스 대표는 “국제적십자위원회는 1864년 스위스 앙리 뒤낭(Henri Dunant)에 의해 엄정한 정치적 중립과 인도주의, 무기가 아닌 대화와 상호신뢰의 원칙으로 설립됐다.”고 설명하고 “전쟁과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생명을 구
김영완 원장 “의사는 환자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서울대병원 의료진 투입...뇌혈관, 심혈관, 중증외상 등 의료원에서 직접 해결신경과, 응급의학과 등 8개 과목 의료진과 함께 시설과 최첨단 장비도 도입 추운 날씨 치고는 제법 겨울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산의료원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연신 주차장을 드나드는 환자들의 차량과 여기저기 공사현장 인부들의 발 빠른 걸음들 때문이었다. 문득 첫사랑이 나비처럼 내려앉듯 이곳에 가슴 두근거리
수년전 취재차 음암면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인근 부장리 고분과 관련 많은 유물들이 초등학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 차 가본 것이다.현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유리로 만든 초라한 찻장은 깨져 있고 먼지가 수북하게 앉아 있었다. 물론 그 속에 있는 토기조각이나 화살촉, 석기 등은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고, 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역사에 관심이 많던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조각들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분이 전근을 가신 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방치된 것이다
지난 2년여 충청남도 민간희생자 신고접수 3만 명 희생자중 단 800여건뿐서산 274건, 태안 268건 등 ...아직도 주변의 냉대와 경계심에 신고 주저 서산 지역 2000여 희생되신 영령님들의 억울함을 해원하고 안식을 추모하는 제2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합동추모제가 30일 서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회장 정명호)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2300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서산유족 회원들은 “68년이 흘렀습니다. 못나고 못난 후손들. 침묵과 굴종의 세월
민주주의 과정에서 정책이나 후보에 대한 의사표현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은 가장 대표적인 의사표현 중의 하나다. 그러나 선거기간 중에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을 비난하고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태도에 우려를 금할 길 없다.더구나 선거 막판에 이르러 A 시장후보 선거캠프 관계자의 시민에 대한 폭력은 이유를 막론하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이와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들의 존엄을 짓밟는 시장을 시민들은 원치 않는다. 즉시 사퇴하고, 사죄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A 시장후보 지지자는 폭행피의자
충남 아산 폐금광 민간인희생자 유해발굴 현장에서 은반지를 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손가락뼈가 발굴됐다.‘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달 22일부터 아산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폐금광에 암매장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은 8일 “오후 4시께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뼈가 발굴됐다”며 “아직 나머지 유해가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감식은 어렵지만 대략 20대의 젊은 여성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확한 나이는 나머지 뼈를 발굴해 봐야 알 수 있다”며 “오랫동안 수많은 유
"천일공노할... 어마어마한 죄상... 양민집단학살""닥치는 대로 총살... 빨갱이 누명으로 죽은 양민 150명"1955년 1월 , , 등 여러 신문이 전한 아산시 배방면에서 한국전쟁 시기 경찰이 자행한 민간인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보도 기사 내용이다. 당시 정부 보유미 횡령(50가마)과 양민학살 혐의로 기소된 신창 지서 유아무개 주임 경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기소내용 중 양민학살 부분만을 들여다보자. - 1950년 10월 초순, 부역자 및 양민 600여 명을 창고에 구금한 후 60명을 오
김광욱(73)씨.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당시 온양읍 방축리에 살던 김씨의 아버지(김갑봉, 당시 30세)는 인민군에게 부역한 혐의로 끌려갔다.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두 남동생이 모두 연행됐다.당시 다섯 살이었던 김씨는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에 김씨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어머니는 아버지는 물론 삼형제가 부역 혐의로 끌려가 금광 구덩이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살해됐다고 전했다.22일 오전 11시 30분, 김씨의 아버지 등 300여 명이 살해돼
충남시민재단이 지난 한 해 동안 충남지역에소 공익에 기여한 단체와 활동가들에 주는 '충남 NGO상' 수상단체로 당진환경운동연합이 선정됐다.지난 6일 충남 내포신도시 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는 '풀뿌리 NGO상' 시상식이 개최됐다. 충남시민사회신년회를 겸한 자리였다.단체부문 상을 받은 송전탑 건설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고, 당진에코파워 석탄발전소 백지화에 기여한 당진환경운동연합이 단독 수상했다.개인부문에는 개인 부문에서는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모임인 공주유족회 결성을 주도하고 희생자 유해발굴을 주도한 곽정근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