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세월이 흘러도 메지골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들

▲ 정명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장과 유족회원들이 메지골 암매장 추정지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1. 논 물꼬 문제로 다툰 사람, 빨갱이로 몰아

“3일 내내 메지골 깊은 골짜기에 버려진 시신 속에서 남편을 찾아 헤맸습니다. 연일 장마비는 내리고...피범벅이와 이미 부패로 불어 오른 시신 속에서 얼굴로는 찾을 수 없어 (신랑이)잡혀 가실 때 입혀 드린 명주바지와 저고리를 찾아 헤맸죠. 내 손으로 직접 지은 바늘 땀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당시 29살 젊은 나이에 신랑을 잃은 어머니는 메지골 그날의 악몽을 전해주셨다. - 황찬순 70세, 아버지 황덕수

“당시 부친은 마을에서 반장인가 이장을 하셨지. 그 해 여름 가뭄이 심했어. 논물이 부족한 때였는데 어느 날 부친과 신 씨가 논 물꼬 문제로 다툼이 있었어. 근데 어느 날 부친이 빨갱이라고 끌려갔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 씨가 악감정을 가지고 부친을 빨갱이로 고자질했다는 소문이 퍼졌었어.” 마을 어르신의 이야기다.

황찬순 씨는 당시 태어난 지 채 4개월. 아버지 얼굴도 그 어떤 추억도 없는 그에게 고향 마을 어르신께서 전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슴 깊이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자리 잡았다.

 

#2. 독립운동가 허경 선생도 빨갱이로 몰아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출신 허경(1918~1950) 선생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홍성군 갈산면 갈산보통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고 서울 경성실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7년 2월 일본 교토의 5년제 경도중학 재학중 독립운동의 이유로 퇴학당한 후 귀국, 전답 20마지기를 팔아 연변을 거쳐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행적은 조선총독부 대전지원 홍성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을 받은 국가 기록원 보관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허경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10일 서산경찰서 소속 사복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된 후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왜 적군도 아닌 정부에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를 이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배경에는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김구 선생과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이 80%를 넘었고, 여기에는 정부수립에 참여한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 참극을 불러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미명하에 100만이 넘는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학살을 감행했다. 독립운동가도 허경 선생도 척결 대상중에 하나였다.

한편, 허경 선생은 유족과 지역구 국회의원인 성일종 의원의 노력으로 2018년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허경 선생의 3째 아들인 허응회 씨도 메지골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고 있다. 아마도 1950년 7월 12일 인민군이 예산, 홍성에 입성한 사실로 비춰 군경 철수 시 대전형무소 이송 중 홍성 인근에서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허응회 씨는 메지골에 묻혀 계실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

1950년 8월 12일 미 병참사령부가 미8군에 보낸 통신문에 적시되어 내용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 연루자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이송도중 홍성군 광천읍 오서산 폐 금광굴에서의 집단학살 당했고, 채 이송하지 못한 일부는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양대리 및 소탐산 일대에서 학살, 매장했기 때문이다.

 

#3. 박광교 태안국민학교 교사도 학살 못 피해

 

박종식(79세) 씨는 당시 태안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박광교)에 대한 기억을 떨칠 수 없다. 교사였던 박광교 씨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시 8~9살의 어린 나이였던 박종식 씨의 눈 앞에서 끌려 나갔다.

“70년 세월이 흘러도 메지골 골짜기를 떠나지 못할 아버지의 혼령을 생각하면 자식된 도리를 하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할까 두렵다”고 탄식을 했다.

아버지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박종식 씨의 한 맺힌 절규는 메지골의 숲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서산시 성연면 일람리 일대 일명 ‘메지골'은 1950년 7월 서산·태안지역 국민보도연맹 연루자 수백 명이 적법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드론 촬영)

 

▲ 일명 ‘메지골'로 1950년 7월 서산·태안지역 국민보도연맹 연루자 수백 명이 적법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6·25 전쟁 시기 서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보도연맹원 희생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그리고 부역혐의희생사건이 상호 고리처럼 연결되어 연이어 3차례 발생했다.

전쟁 발발 직후 맨 처음 군경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집단 살해한 것이 직접적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이어 인민군 점령기에 보복적 차원의 집단살해사건이 있었고, 수복 후에는 상상을 초월한 잔혹행위와 더불어 대규모의 집단살해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서산·홍성 방면으로 남진하자 서산 경찰은 예산 지역의 경찰과 함께 신창 등지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진 서산과 태안 경찰은 7월 12일경 지역의 모든 공공 기관을 소개한 뒤 철수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전쟁 직후부터 군 경찰서나 면 지서에 예비 검속을 해 두었던 보도 연맹원이나 요주의·요시찰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경찰이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등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한 것도 퇴각 직전인 7월 9일부터 12일 사이였다. 메지골 마을 주민 공 모 씨는 그날 거의 하루 종일 총소리가 요란했고, 그 당시 어른들이 메지골 산골짜기 초입부터 끝까지 시체들로 가득차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서산경찰은 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연행하거나 불러들여 구금한 후 인민군의 남하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산 성연면 메지골 △당진 한진포구(목캥이) △태안 백화산(사기실재)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당시 태안경찰서에 순경으로 근무했던 이 모 씨는 진실화해위의 조사에서 “충남경찰국의 지시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일부를 대전형무소로 이송했고, 후퇴하기 2~3일전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을 ‘즉결처분 하라’는 공문을 충남경찰국으로 받았다”고 진술했다.

메지골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김 모(81세) 씨의 증언에 따르면 7월경 트럭 1대에는 경찰이, 트럭 4대에는 민간인들이 골짜기로 들어 왔고, 흰 노끈으로 묶인 사람들을 줄줄이 메지골로 끌고 들어 간 후 총소리가 났다.

이후 학살된 시신들이 겹겹이 쌓였고, 경찰이 철수한 후 수일 동안 가족들이 우마차를 끌고 와 시신을 찾아 갔지만, 찾아가지 못한 시신들은 산 짐승에게 훼손되고, 부패가 시작되면서 암매장이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 서산시 성연면 일람리 마을회관에 설치된 서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 안내문

 

서산군의 경우 1950년 7월 18일부터 9월 30일경까지 인민군 3개 연대가 군 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의 지방 좌익들은 인민군과 노동당의 지도하에서 군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뒤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인민 공화국 시기, 서산군에도 정치 보위국의 지휘 하에서 군 내무서, 면 분주소, 리 자위대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군·면 단위의 노동당과 인민 위원회 조직, 또는 청년 동맹, 농민 동맹, 여성 동맹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핵심 내용으로 한 북한식 토지 개혁, 8·15해방을 기념한 궐기 대회 형식의 인민재판, 징병과 전쟁 물자 징발 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1950년 9월 중순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자 서산 지역에 주둔했던 인민군도 인민군 전선 사령부의 후퇴 명령에 따라 1950월 9월 30일경부터 후퇴를 시작했다. 당시 태안 지역에도 미군들이 함포 사격을 하면서 근흥면 지역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퇴각하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대규모 우익 민간인학살 사건이 소탐산과 양대리에서 벌어졌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대한청년단원, 공무원, 경찰공무원과 가족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 여자까지 경찰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대상에 포함시켰다.

소원면 부면장 김성용 씨, 전직 경찰이었던 이창영 씨, 의용소방대였던 심형섭 씨 등도 서산내무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양대리에서 총살 혹은 창으로 척살되었다. 심지어 박종혁 씨는 집안이 부유하다는 이유로. 박홍진 씨는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와중에 집안끼리의 토지문제 등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밀고 되어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진실화해위 기록에 의하면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의 학살은 서산시 177명, 태안군 156명 모두 333명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자락에는 당시 희생된 300여 명 중 28구가 안치돼 있는 ‘반공호국희생자 합동위령탑’이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산군이 수복되자 서산 지역의 우익 청년(의용 경찰, 의용 소방대, 대한청년단)들은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치안대를 조직한 뒤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부역자들을 무단으로 색출하여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사사로운 학살은 10월 8일 경찰 진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 등에 의해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메지골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부역 혐의자들이 좌익이란 죄명을 쓰고 집단 학살되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북한군 점령기에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 및 우익단체 등이 주축이 된 치안대가 자의적으로 처형 대상자를 정하면서 피해 규모가 컸다”고 밝혔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한 경찰은 “부역 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이 많이 개입됐다”고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진술했다.

소탐산 부역혐의자 집단살해사건은 1·4후퇴 직전에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에 의해 발생했다. 사건 당시 소탐산에 거주하고 있는 한○○은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트럭으로 이송하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약 한 시간 동안 총소리를 들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 정○○도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급해서 그냥 끌고 갈 수 없으니까 (부역자들을) 소탐산에서 죽였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당시 서산경찰서 ○○지서장 등 다수의 경찰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됐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치안대원과의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는 등 부역혐의가 불분명한 민간인의 희생도 매우 많았다”고 밝혔다.

 

일본제국주의에 유린된 한반도

좌우익 이념논쟁은 이제 그만...뭉쳐야 산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유린된 한반도는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이는 좌우익 이념논쟁으로 인한 민족분열로 고착화 되었다.

8월 2일 백색국가 명단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는 등 일본은 대한민국을 향한 경제침략을 본격화 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910 한일합방,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오늘의 2019년에 벌어진 3번째 도발이다.

427년전 명량해전을 앞 둔 이순신 장군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단생산사(團生散死)를 외쳤다. 우리 정부와 국민의 대응이 어떠해야 될지 다시금 이를 악물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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