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민족분단사에 감춰진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나!
69년만에 인정받은 독립유공자 故 유한종 선생

독립유공자 故 유한종 선생이 돌아가신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보도연맹 사건 안내문
독립유공자 故 유한종 선생이 돌아가신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보도연맹 사건 안내문

 

그동안 국가보훈처에 다섯 번씩이나 아버지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지요. 부친이 돌아가신 69년 만에 이번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그나마 피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었습니다.”

지난 815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의 명예를 뒤 찾은 서산 해미출신 유한종 선생의 여섯 째 아들인 유승웅 씨는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눈가에 맺히는 눈물로 대신했다.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 출신인 독립운동가 고 유한종 선생은 서산시 해미면 공립보통학교 학생 신분으로 일제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유한종 선생은 1919319일과 324,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환송회를 계기로 학생 및 주민들과 해미면 뒷산(현 전망대)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해미시내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당시 해미 만세운동은 유한종, 이성계, 김관용외 16명이 활동했던 것으로 형사사건부 수행인명부 기록에 나타나 있다.

 

69년만에 인정받은 독립유공자 故 유한종 선생에 대한 대통령 표창을 여섯 째 아들인 유승웅 씨가 들고 있다.
69년만에 인정받은 독립유공자 故 유한종 선생에 대한 대통령 표창을 여섯 째 아들인 유승웅 씨가 들고 있다.

 

 

보도연맹원 낙인 찍어 메지골서 총살

69년을 돌아오지 못한 망자의 원혼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잘산다고 했던가.

일제만행과 이어진 민족분단의 이념전쟁은 고 유한종 선생의 가족을 풍지박살 냈다. 해미 3.1만세운동으로 일경의 표적이 된 유한종 선생의 가족중 첫째 아들 유영내 씨는 1942년 일본군에 강제 동원되어 태평양전쟁 일본군 제14연방군 제35군 제30사단 보병 제77연대로 끌려갔다. 태평양 전쟁 기록에 따르면 유영내 씨는 194571일 필리핀 한 섬에서 사망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도 유골은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고 유한종 선생은 19506.25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의 공권력에 의해 보도연맹원으로 낙인 찍혀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 참극을 불러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미명하에 100만이 넘는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학살을 감행했다. 유한종 선생도 백야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홍성군 갈산면 갈산보통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고 19372월 일본 교토의 5년제 경도중학 재학중 독립운동의 이유로 퇴학당한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출신 독립운동가 허경(1918~1950) 선생과 함께 척결 대상중에 하나였다.

이때 군경은 일본으로 끌려가 3년간 노무자로 일하다 해방 후 귀국한 둘째 아들 유영주 씨도 아버지 유한종과 함께 보도연맹원으로 낙인찍어 부자를 함께 총살하는 참극을 벌였다.

그리고 셋째아들 유영환 씨는 6.25 전쟁 당시 국군 1사단 15연대 10중대 하사로 참전해 경기도 연천군 고지 전투중 전사했지만 아직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그 당시 4살이던 6째 아들 유승웅 씨는 나중에 어머니께서 용암리에 사는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이 메지골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시신 위치를 알려줘 혼자서 총알 자국이 6발이나 박혀있는 시신을 수습했다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고 전했다.

 

수백명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서산시 성연면 메지골 현장
수백명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서산시 성연면 메지골 현장

 

 

빨갱이라는 주홍글씨 낙인

가족의 아픔, 민족의 아픔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벌어진 민족분단과 친일 세력에 의해 왜곡된 이념전쟁은 고 유한종 선생의 아픔만이 아닌 가족의 아픔, 민족의 아픔이었다.

유숭웅는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동안 수차례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으나 매번 거절당했고, 누구한테도 하소연 할 때 없는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고 전했다.

유승웅 본인도 전방에서 군복무 당시 연좌제로 묶여 비밀취급인가(보안 등급)를 내주지 않고 후방으로 전출됐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유승웅 씨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보도연맹사건 등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전달하여 바른 역사관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고, 한 평생을 눈물로 숨어서 지냈다. 그동안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밝혀 달라고 해도 정부는 외면했다아프지만 후손들을 위해 올바른 역사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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