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68주기 서산 합동추모제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68주기 서산 합동추모제, 이애리 선생의 진혼무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2년여 충청남도 민간희생자 신고접수 3만 명 희생자중 단 800여건뿐

서산 274건, 태안 268건 등 ...아직도 주변의 냉대와 경계심에 신고 주저

 

서산 지역 2000여 희생되신 영령님들의 억울함을 해원하고 안식을 추모하는 제2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합동추모제가 30일 서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회장 정명호)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2300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서산유족 회원들은 “68년이 흘렀습니다. 못나고 못난 후손들. 침묵과 굴종의 세월 넘어 이제야 두 번째 술 한잔 올리나이다”며 “평생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생전에 효도 한 번 못해 본 것이 한이 되어 불효자는 가슴을 치고 통곡합니다”고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은 “지난 2015년 11월 안희정 충남지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억울한 우리 유족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요청과, 우선 충남도내의 시군에 피해자신고 민원창구를 개설하여 달라는 요청을 드린바 흔쾌히 받아 주어 2016년 5월부터 지난 5월까지 2년간 충청남도 민간희생자 신고접수를 받은 결과 3만 명의 희생자중 812명의 희생자만이 신고했다”고 말하고 “아직도 짐승만도 못한 방법으로 처참하고 잔인하게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냉대와 경계심으로 신고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목을 매었다.

실제 서산 274건, 태안 268건, 아산 77건, 부여 25건 등 충남 전체에서 3만명의 희생자중 단 812건(희생자가 동일한 중복 52건 포함)만이 새롭게 신고접수 되었다.

이런 결과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9년 결과보고서를 내는 등 5년간의 조사시 조사대상도 주로 서산경찰서 신원기록 심사보고서상의 희생자에 국한되었고, 서산시의 경우 팔봉면, 지곡면, 해미면, 고북면 등 일부만 조사되었을 뿐 그 외 지역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볼 때 아직도 숨을 죽이며, 세상을 믿지 않는 사회분위기가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100만

전쟁기의 한반도, 인권유린의 전시장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그도 적군이 아닌 정부에서 자기의 국민을 이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배경에는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김구 선생과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를 넘었고, 당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등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 참극을 불러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100만이 넘는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학살을 감행했다.

학살희생자는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좌익경력자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빨지산 활동지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 등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중에는 김구 선생 측 독립운동가 출신 등 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포함됐다.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출신 허경(1918년생) 선생이 그런 인물이다. 허경 선생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홍성군 갈산면 갈산보통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고 서울 경성실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7년 2월 일본 교토의 5년제 경도중학 재학중 독립운동의 이유로 퇴학당한 후 귀국, 전답 20마지기를 팔아 연변을 거쳐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행적은 조선총독부 대전지원 홍성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을 받은 국가 기록원 보관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허경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10일 서산경찰서 소속 사복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된 후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아마도 1950년 7월 12일 인민군이 예산, 홍성에 입성한 사실로 비춰 군경 철수 시 대전형무소 이송 중 홍성 인근에서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산태안 부역혐의자 30여 곳에서 집단 살해

진화위, 서산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1,000여명 넘어

집단학살을 당한 이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자의든 타의든 부역혐의자가 주 대상이었다. 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은 좌익에 의해 희생당한 유가족과 우익단체를 주축으로 구성된 치안대가 주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보니 개인적 갈등 관계에 있던 마을 사람들조차 희생당하는 등 군경과 치안대의 임의적 판단과 사적 감정이 개입되기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최소 1,865명의 희생자들은 1950년 10월 초순에서부터 12월 말경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집단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전쟁 발발 직후에는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대전형무소로 유치되어 살해당한 서산지역 보도연맹원은 400여명 정도, 이 사실은 1950년 8월 12일 미 병참사령부가 미8군에 보낸 통신문에 적시되어 있다. 또한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이송도중 홍성군 광천읍 오서산 폐 금광굴에서의 집단학살과 채 소송하지 못한 채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양대리 및 소탐산 일대에서 자행된 직접 학살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유가족 중 한 분은 “당시 경찰의 손에 희생당하신 외할아버지는 당시 어머니와 이모 둘 딸만이 전부였던 집의 가장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17살, 이모는 11살쯤 시절에 아버지 시신을 찾느라 덜덜 떨면서 메지골을 헤맸다고 들었다”고 기억했다.

 

유족들 “과거사 정리 기본법 즉각 개정” 주장

“정부와 지자체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 조성해야”

 

합동추모식에서 유족들은 “정부와 국회는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즉각 개정할 것”과 “정부와 지자체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을 즉각 조성하라”고 주장했다.

성일종 의원은 추모사에서 “현재 계류중인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은 그 내용이 복잡하고, 부처간 조율도 복잡하게 얽혀있어 단시간내 결론이 나긴 어렵다. 우선 추모공원 문제는 기본법 개정안과 별도로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반세기를 넘어 그 기억조차 이 땅에서 사리지고 있는 6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전쟁 중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의 피해는 줄지 않았다. 이념에 대한 이 사회의 편견이 또아리를 틀고 피해자를 감시했다.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정부였다. 당시 학살을 실행했던 이들은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었다.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사회주의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은 이들을 수십여년간 따라다녔다. 주로 희생자의 자녀였던 피해자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핍박 속에서 유년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들의 낙인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지워졌다. 1990년대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전국조직인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전국 각지의 유족과 학계 등의 노력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제정됐다.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사실을 인정한 것도 이 시기다. 당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담화 형식으로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이념 전쟁인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죄 없는 민간인”이라며 “68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사과와 과거사 정리 없이는 우리의 한을 풀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학살했던 주범들이 “왜 과거를 들추나. 과거는 과거일뿐”이라는 항변은 희생자 가족에 대한 2차 학살과 다름없다. 일제청산과 맞물린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는 한 후손들에게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한편, 이날 추모식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희생자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을 비롯해 성일종 의원, 이완섭 시장, 맹정호 서산시장 당선인, 조한기 청와대 제1부속실장, 이경화 시의원, 허영일 노인회장 등 내외빈과 유족회원200여명이 참석해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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