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조성 주저하지 말라

▲ 박두웅 편집국장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안식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제3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합동추모제가 14일 서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추모제에서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2300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추모제 내내 눈시울이 붉어진 유족 회원들은 “제삿날은커녕 시신도 찾지 못한 불효를 어찌 하오리까”라며 흐르는 눈물을 가렸다.

영문도 모른 채 대전골령골, 메지골, 양대리, 교통호 등 30여 곳으로 끌려가 억울하게 희생되어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2,000여 희생자들. 지금 이들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다. 희생자들의 유골발굴도, 이들에 대한 추모탑이나, 추모공원조차 없는 현실은 오늘날의 국회 모습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은 “우리 유족은 수년 동안 정부와 국회에 계류중인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을 계속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요원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과 당선된 이후에도 과거사 문제 해결을 강조하며, 세 번째 국정과제에 포함시켰으나 입법기관인 국회는 여야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유족들의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목을 매었다.

억울하게 죽어 간 그들은 국가공권력의 희생자들이었다. 왜 적군도 아닌 정부에서 자기의 국민을 이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배경에는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김구 선생과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이 80%를 넘었고, 여기에는 정부수립에 참여한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등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 참극을 불러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미명하에 100만이 넘는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학살을 감행했다.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사회주의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은 이들을 수십여 년 간 따라다녔다. 주로 희생자의 자녀였던 피해자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핍박 속에서 유년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들에 대한 낙인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지워졌다.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전국조직인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전국 각지의 유족과 학계 등의 노력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제정됐다.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사실을 인정한 것도 이 시기다. 당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담화 형식으로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과거사 정리가 없는 미래가 존재할까?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는 국회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과 추모공원 조성에 주저하고 있는 지자체장들의 모습 속에서 친일의 검은 그림자를 본다면 너무 지나친 이야기일까.

유족들은 “이념 전쟁인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죄 없는 민간인”이라며 “69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사과와 과거사 정리 없이는 우리의 한을 풀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회는 ‘과거사 정리법 개정’을, 서산시는 민간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할 수 있는 추모공원 조성에 바로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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