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존재들의 잔상-3

요즘 매스컴에서 80대 노인의 문맹 탈출 스토리를 많이 접하게 된다. 1950년대까지 농촌에서는 여자아이들의 초등학교 미취학이 보편적이었으니 이분들은 한글을 깨우칠 기회를 잃은채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문맹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1961~1962년도에 전국적으로 실시한 야학(夜學) 문맹 퇴치에 크게 기여하였다. 야학의 교재는 정부로부터 무료로 제공된 ‘한글 공부라는 책이었고,  한글 공부란 책의 첫 부분에는 남성 모습의 삽화에 아버지 아기 아니요, 여성 모습의 삽화엔 어머니 어부 부어요 등 받침이 없는 배우기 쉬운 낱말로 시작했다.

하지만 몇 장 뒤에는 앓는 사람이다 감기를 앓는다 등 획이 복잡한 낱말의 문장을 통해 홀소리와 닿소리를 조합하여 나오는 소리가 글자로 만들어지는 이치를 터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야학생들은 이 책으로 한 달간 야학에 다니며한글 해득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책 속에는 아라비아 숫자와 구구단도 있어 한글 공부란 책만 익히면 문맹 탈출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계산법도 터득할 수 있는 매우 내실 있는 교재였다.

정부에서 이런 교재를 만들어 문맹 퇴치를 하려고 해도 교육할 공간과 교육시킬 인적 자원이 문제가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이장을 통하여 마을의 사랑방을 구하고 교사역은 해당마을의 ·고등학생이 맡도록 했다

배워야 할 학생이 낮에는 밭 매고 나무하는 아이들이고, 부모들도 교육열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니 농번기엔 자녀들을 야학에 보낼 리 없었다. 그래서 농한기인 겨울 밤 시간을 활용했다. 선생인 ·고등학생들도 왕복 15km 이상을 매일 걸어 통학했으니 방학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 어려워 겨울방학 기간에 야학당을 개설해야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 없는 마을은 중학생들로만 선생 봉사단을 꾸리게 되었다. 야학생 대상은 한글 해득이 안 된 아동과 청소년들로 아홉 살부터 십 대 후반까지 모두 한 방에서 배웠다. 그러다 보니 선생인 중학생보다 나이가 많고 덩치도 큰 제자가 있는 난감한 상황도 생겼다.

많은 나이 차이로 야학당이 봉숭아 학당분위기가 떠오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보다 진도가 늦으면 큰 망신이니 열심히 공부해야 했고, 영특한 아이는 언니들보다 진도가 빨라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하였기에 면학 분위기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간의 야학 기간이 한글을 모두 배우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지만 야학생들이 나이가 많고 글씨를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있기에 한 달 동안의 배움으로 한글을 읽고 쓰는 원리는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야학생들은 야학당이 문 닫은 후에도 한글 공부란 책으로 독학하여 한글을 대략 깨우칠 수 있었다. 공책이 없어 빈 담뱃갑이나 시멘트 포대종이 등 얻어지는 종이의 빈 공간에 글씨 쓰는 연습을 하였고 결국 이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의 문해력을 갖춘 문명인이 되어 산업화 되던 도시로 나갈 수 있었다.

사정상 그 당시 야학당 혜택도 못 본 분들이 평생의 한을 풀기 위해 열공하셨고, 결국 문맹탈출에 성공하신 것이다.

조상일 음암면 주민자치회장
조상일 음암면 주민자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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