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8가구 25명만 남아...“인권·복지 행정의 햇살은 요원”

【충남도 기획】 사라지는 마을...한센인 정착촌을 가다

고령화로 인해 경제적 빈곤에 처한 한센인 정착촌 주민들. 이들이 사실상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장애인 지원금(월 25만 원)에 크게 못 미치는 위로지원금 명목으로 월 17만 원을 받고 있다.
고령화로 인해 경제적 빈곤에 처한 한센인 정착촌 주민들. 이들이 사실상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장애인 지원금(월 25만 원)에 크게 못 미치는 위로지원금 명목으로 월 17만 원을 받고 있다.

 

# 사라지는 마을 성광원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축산차량 소독시설이 을씨년스럽다. 좁은 골목길 좌우로 늘어선 축사들은 오랜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폐허가 됐다. 축사 안을 들여다 보니 부서진 문과 창들, 그 사이로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비닐들이 찢어진 치마처럼 걸려있다.

돼지분뇨 냄새와 구석에 남겨져 있는 녹슨 시설로 양돈축사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사이 사이로 몇 평 되어 보이지 않는 집들이 축사 사이로 조그만 몸을 비집고 낑겨 있다. 스러져가는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골방들이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었다.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위태로운 집이든 축사든 마을 시설들은 마치 십수 년 전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으로 퇴락해가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다. 마을회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주민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는다. 늙은 주민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파고를 넘어설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철거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폐축사들은 악취를 풍기며 마을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고 지붕이 팍삭 주저앉은 폐가들 역시 마을의 흉물로 변해가고 있다. 햇살은 따스하게 내리 쬐는데 마치 전쟁이 휩쓸고 간 모습처럼 사람들이 짐도 제대로 챙길 사이도 없이 황급히 피난을 떠난 것과 같은 공허함이랄까. 마을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폐허가 되어 있는 성광원 축사들
폐허가 되어 있는 성광원 축사들

 

# 권익위 한센인 정착마을 석면조사도 무의미

마을 주민들이 모두 연로하다 보니 이제 마을회관도 소용이 없나 봅니다.” 마을주민 A 씨의 안내로 굳게 닫인 문을 열고 들어 간 성광원 사무실 2층에는 먼지만 수북히 쌓인 탁구대가 부서진 채 남아 있다. 문도 부서지고 창문도 깨진 채 방치된 지 꽤 오래된 모양새다.

“70대가 세 분 있지만 몸이 성치 못하고 다들 80대 이상이라 이제 모임도 갖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사라지는 마을이 이곳인 것 같습니다.”

A 씨는 기자의 사라지는 마을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길게 탄식의 한 숨을 내밷었다.

지난 번에 국가 권익위에서 사람들이 왔었죠. 전국 한센인 정착마을 석면조사로 내려 왔는데, 성광원은 석면교체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합디다.”

이유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고 축사들이 모두 무허가 건물이기 때문이라고 씁쓸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A 씨는 사실 축사 지붕을 교체해준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어요. 80세를 훌쩍 넘긴 마을 사람들이다 보니 다시 돼지를 키울 사람도 없고요........”

폐허가 되어 있는 성광원 축사들
폐허가 되어 있는 성광원 축사들

 

한센인의 인권과 관련 지원사업으로 전개된다는 국가 행정이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는 참담한 단면이다. 현재 정착촌이 당면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제는 정착촌 주민의 토지소유권 문제, 무허가 축산시설의 문제, 환경문제, 정착촌 해체와 그에 따른 이주문제 등이 핵심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센인의 소득보장에 관한 욕구(빈민)는 그들 자신이 한센인으로서 직업활동 등 사회 내에서의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사실(한센인)을 바탕으로 한다. 이로부터 오늘날 그들이 고령화되어 축산업 등 산업활동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고령화), 한센병 이환 과정과 고령화과정에서 발생한 장애로 인해 소득가득능력 저하되었다는 점(장애인) 및 우리나라 농축산업의 전반적인 파탄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농민)로부터 그들에게 궁핍한 삶이 강요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한센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충족시켜야 하는 복지욕구는 한센인’ + ‘노인’ + ‘장애인’ + ‘빈민’ + ‘농민이라는 5 차원의 누적적(부가적)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광원 마을에는 대다수 축사들이 폐허가 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성광원 마을에는 대다수 축사들이 폐허가 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이러한 다차원적인 문제상황 해결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노력은 부족하다 못해 단편적이며, 방관자적 태도를 아직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한센인’,농민이라는 두 차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노인’, ‘장애인빈민은 전통적으로 사회복지의 주요 범주적 대상자로 인정받았고, 이에 대한 복지정책들이 관련법들의 기반위에 수립되어 있음에도 해당 법들 테두리 안에서는 한센인은 설 땅이 없다.

더구나 한센인은 전염병관리와 관련한 법, 즉 의료관련 법에 주로 질병통제라는 맥락에서 소극적으로 언급되었을 뿐, 이들을 적극적인 복지대상집단으로 인정하는 입법조항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성광원 사무실과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그 내부
성광원 사무실과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그 내부

 

# 1957년 성재덕 신부가 주도해 설립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한센병 환자 거주 시설인 성광원(성광마을)을 찾았다.

성광원은 1956년 논산본당(현 부창동성당)의 성재덕 신부가 강경 지역에서 정착지를 얻지 못한 채 떠돌고 있던 음성 상태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치료하는 등 구호 사업을 전개하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논산본당 천주교 신자들의 주도로 나환자들을 위한 본격적인 구호 시설로 건립된 곳이다.

195712월 현 논산시 광석면 율리 132,232의 부지에 건물 5채를 지어 양생원이라 칭하고 논산 지역 15~16명의 음성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했다. 당시 고위층 군인이었던 나덕보(다두)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건물을 지어 봉헌하였다고 전해진다. 1972년 신탄진 근처에 거주하던 한센병 환자 10가구가 이주한 이후 대한나협회(현 한국한센복지협의회)와 상의하여 정부의 후원을 받는 조건으로 천주교 신자인 한센병 환자뿐만 아니라 비천주교 신자인 한센병 환자도 이주하게 되었다. 이처럼 초기에는 한센병 음성 환자 21가구 59명이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후 2004년에는 45세대 108명이 거주했다. 주민 대부분이 한센병 후유증을 앓고 있는 23급의 장애자들이었고, 87명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였다. 그들은 대부분 양돈과 양계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IMF로 인한 축산업의 파산과 고령화와 장애로 인해 소득능력의 한계는 이들을 빈곤의 수렁을 몰아 넣었다. 국가토지 불하로 개인 소유가 인정된 마을 반쪽은 경매와 저가매매로 이미 외지인들이 차지해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해 운영하는 기업농으로 변했고, 한센인 환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반쪽은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성광원 사무실과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그 내부
성광원 사무실과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그 내부

 

# 영성의 뿌리 생제 피에르(성재덕) 신부

성광원 설립자이며 성가소비녀회의 설립자인 생제 피에르(Singer Pierre, 한국명 성재덕) 신부는 1910913일 프랑스 아라스 교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93577일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됐다. 합덕본당과 제물포(현 답동)본당 보좌 신부를 역임한 뒤 1939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사자, 부상자, 고아와 무의탁 노인이 수없이 많았다. 생제 신부는 이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외국의 수녀회를 초청하기엔 어려움이 있었기에 그는 자생 수녀회를 계획하게 됐다. 생제 신부는 자신과 뜻을 같이한 두 명의 지원자를 모아 성가소비녀회를 창립하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도록 했다.

생제 신부는 마리아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응답과 성 김효임 골롬바·효주 아녜스 자매가 재판장 앞에서 스스로를 소비녀’(작은 여종)로 칭했던 것에 착안해 수녀회 이름을 정했다.

19431225일 예수 성탄대축일에 성가소비녀회가 성가정의 겸손과 가난을 본받아 가난한 자, 환자, 무의탁자들을 돌볼 것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생제 신부는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낮춰 이 세상에 내려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참다운 섬김의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가난한고 불우한 사람들에게로 내려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회가 성탄절에 시작된 데에는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회원들도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창설자의 정신이 담겨있다.

1948년 파리외방전교회는 서울교구를 완전히 한국인 사제에게 양도하고 대전에 새 포교지를 창설할 임무를 받았다. 생제 신부 역시 서울을 떠나 대전교구로 이동했다. 생제 신부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었고, 논산본당에서 14년간 사목하면서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세웠다. 그리고 이때 나환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논산시 광석면에 성광원을 설립했다.

생제 신부가 설립한 성가소비녀회는 수녀들이 직접 삯바느질이나 궂은 일을 해 생활비를 벌었을 뿐만 아니라 본당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함께 해왔다. 한국전쟁 중에는 대구, 부산, 제주도 등지에서 고아를 돌보고 부상병을 치료해왔다.

196912월 생제 신부는 자신이 설립한 성가소비녀회의 지도신부로 왔고, 수련소 강의와 영성 강의를 하면서 수녀들을 지도했다. 그는 1992226일 선종했다.

성광원 마을 공소
성광원 마을 공소

 

# 논산 성광원 경당 설립되다

살덩어리가 오그라들고 신경이 마비되고 뼈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 후엔 저주처럼 따라다니는 이름 문둥이! 병이 다 나은 후에도 버려져야하는 무리들. 친구 가족들과도 함께 살 수 없는 한스런 인생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받고 독새풀보다 더 질긴 삶의 의미를 주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당시 음성 나환자촌인 성광원 공소 신자들이 경당건립을 호소한 일부 내용이다.

논산대교동성당 성광원공소는 19563월 논산본당의 생제 신부가 양생원(현 성광원)을 설립하면서 전교되어 1958년 김영재 회장을 중심으로 17명이 공소를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나석주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가졌고, 이어서 흙벽돌집을 지어 10여 년간 사용하다가 1973년에 27평 규모의 강당을 건립했다. 그 후 1984년 현재의 강당(50, 철근콘크리트)을 건축하고, 1986년 수녀원을 신축하였는데 건축비는 나사업가연합회의 지원과 공소 교우들, 본당지원에 힘입었다. 교세로는 전성기였던 1980년대는 100여 명이 되었으나 18가구 25명만 남아 있는 현재는 그 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 20043월 폭설...잊혀지지 않는 성광원의 눈물

2004년 이른 봄, 때 아닌 폭설이 성광원을 덮쳤다. 3월 사상 최악의 폭설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논산시 광석면 율리3구 성광원 마을은 마을 전체가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마치 융단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붕괴된 축사에서 가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인적마저 끊긴 마을에는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가득했다.

당시 이 모 씨는 연무읍 안심리 소재 야산에서 극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6000만 원이 넘는 빚에 허덕이던 이 씨는 애지중지 키우던 돼지 150여마리가 폭설로 떼죽음을 당하자 한 많은 세상살이가 괴롭다며 술로 괴로운 심정을 달랬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됐다.

돼지와 닭을 키우며 자활의지를 불태우던 성광원 한센인들은 IMF와 함께 몰아 친 축산 파동으로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부채를 지고 있던 상황인데다 사상 초유의 폭설로 하루아침에 생활 터전을 잃게 됐다. 당시 18가구가 양계사와 양돈사를 모두 잃었다.

재기의 의지를 꺾어 놓을 만큼 처참하게 부서진 축사, 눈벼락을 맞고 폐사한 돼지와 닭들은 성광원 주민들의 앞날을 암담하게 했고, 이 씨의 죽음은 말 없는 그들의 눈물이었다.

당시 폭설이 내린 다음날 육군훈련소 훈련병 100여명이 투입돼 제설작업에 나선 것을 제외하고 성광원의 복구를 위해 지원된 것은 포크레인 2대가 전부였다. 한센인 정착마을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몰이해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센인이 돌아가시고 빈집이 된 마을 내 주택
한센인이 돌아가시고 빈집이 된 마을 내 주택

 

# 한센인 정책마을...“인권·복지 행정의 햇살은 요원

사회양극화·저출산·고령화 3대 위기 극복으로 더 행복한 복지 충남만든다는 충남 복지행정, 하지만 2021년 이제 서산 영락마을과 논산 성광마을 두 곳에 40여 가구만 남은 한센인 정착마을에게는 머나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넉넉지 않은 공적 지원도 한센인들의 빈곤을 강화한다. 이들이 위로지원금 명목으로 정부에서 받는 지원금은 월 17만 원이 전부다. 사실상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장애인 지원금(25만 원)에 크게 못 미치는 지원을 받고 있다.

한센인 정착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건 단순하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 살 만한 마을을 가꾸고 싶다는 것이다. 평생을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 온 마을에 마을 개발은커녕 복구도 어렵다. 토지 소유권도 없고 건물은 무허가라는 이유다. 정부의 관심과 지원도 일회성,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집단수용소와 다름 없는 정착마을로 몰아 넣은 법과 사회의 배척이 또 다시 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세상에서 소멸되기 만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

이 순간에도 한센인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다우리에 가둬놓고 돼지, 닭 키워 스스로 자립하라더니 이제 그 땅이 너희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갈 데도 없는 노인들의 죽음만 기다리는 사회가 우리나라입니까. 삶이 얼마 안 남았을지라도,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요.”

마지막 남은 한센인 마을 주민들의 눈물이다.

이 취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글 싣는 순서>

소록도, 아픔의 땅에서 치유의 섬으로

사라지는 마을...서산 한센인 정착촌 영락마을

논산 한센인 정착촌 성광마을의 눈물

한센인 정착촌 변화, 그 성공사례를 보다

한센인 정착마을의 현황과 미래 - 한국한센총연합회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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