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치유의 마을’로 재탄생 되길...”

【충남도 기획】사라지는 마을...한센인 정착촌을 가다

서산시 운산면 영락마을 입구
서산시 운산면 영락마을 입구
서산시 운산면 영락마을 전경
서산시 운산면 영락마을 전경

 

한센인들에게 찍힌 사회적 낙인은 자녀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부모가 한센병을 앓는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진학은 물론 직장, 결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고통의 대물림을 막는 방법은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는 것밖에 없었다.

한센인의 평균 연령은 78.1세로 이 중 절반 이상(54.2%)이 독거노인으로 산다. 10명 중 8명 이상(83.4%)은 자녀가 있었지만 47.5%는 자녀와 따로 살고 연락도 하지 않는다. 따로 사는 일반 노인 비율(7.9%)과 비교하면 현저히 높은 수치다. 특히 정착촌에 사는 한센인 10명 중 6(64.3%)은 자녀가 있음에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한센인 2세들은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는 뜻의 미감아로 불리며 성장했다. 교육의 기회도 제한적이었다. 일부 학부모들의 거센 반대로 한센인 자녀들은 일반 학생들과 분리돼 교육을 받았다.

일부 한센인들은 경제적 이유로도 자식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자신을 부양할 자녀가 있을 경우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탈락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한센인들의 한 달 수입 평균은 60여만 원에 불과했다. 대부분 월 15만 원의 한센인위로지원금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과거 한센인 정착마을은 낙인과 차별에 고통받았다면 현재는 고령화와 경제활동의 중단으로 인한 경제 문제에 고통받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고통은 자녀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 한센인들은 국가와 지역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본 취재는 인권침해로 인하여 피해받은 한센인의 인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련의 제도적 노력의 실제 효과를 분석하고, 동시에 그러한 제도적 노력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한센인들이 가진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사회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소외된 이들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지에 대한 심층 취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이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정당한 구제나 보상을 할 수 있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지원 방안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해소를 위한 정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탐사취재를 진행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영락교회 전경
영락교회 전경

 

# 집 앞 고풍저수지는 마을에 처음 들어온 날처럼 푸르다. 당시 그녀 나이는 꽃다운 31. 남편을 따라 한센인 정착촌인 영락원에 들어왔다. 벌써 45년 전 이야기다. 뒷동산 진달래 꽃보다 더 아름답다던 그녀는 이미 백발이 된 할머니가 되었다. 당시 정부는 한센인 정착마을을 조성하는 정책을 폈다. 한미재단에서는 수용되는 한센인들에게 방 한칸에 부엌이 딸린 블록으로 지은 집을 나눠줬다. 고풍저수지를 끼고 인적이 없는 골짜기에 30여채의 성냥갑 같은 집들이 마치 수용소처럼 늘어섰다.

도배도 안된 시멘트벽이 을씨련스럽다. 숟가락과 냄비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을거다. 정리랄 것도 없는 이삿짐을 푸는데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저수지만 멍 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 없이 정적만 흘렀다.

폐허로 방치된 주택
마을 창고
폐허로 방치된 주택
비탈진 지형에 따라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 모진 게 생명이다. 사라진 꿈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하루에 또 다른 하루가 보태질 뿐이다. 마을엔 한 달에 한 번꼴로 정부에서 배급식량이 나왔다. 보통사람들도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시절, 배급이라고 해봐야 쥐꼬리보다 좀 나은 편이다.

아침이면 몇몇 마을 남정네들이 부산하다. 온갖 손가락질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성치도 않은 몸들을 이끌고 동냥을 나갔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까지 문둥이라고 돌팔매질을 해댔다. 전염성이 없는 음성임에도 문둥병을 퍼뜨린다며 적개심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누가 죽여주지도, 나 스스로 죽지도 못하는 죽어지지 않는 모진 목숨이니 살아야 했다.

폐허로 방치된 축사들
폐허로 방치된 축사

# 할배가 그녀 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되어 간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부터 남편은 매일 퍼 마시던 술도 마다하고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갔다. 입에 달고 살던 욕지거리도 하지 않았다. “, 집에 데려다 줘.” 진통제를 맞고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입술에서 나온 첫 마디. “안돼요. 병원에서 치료를 끝까지 해야 해요.” 자신없이 끝을 흐리는 대답에 남편이 화를 낸다. “집에서 죽으면 니 무서울까봐 그렇지.” 어이없기도 하지만 사실 무서웠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온 평생이었는데, 무엇이 그리 무서웠는지 그녀는 죽음이라는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집에 온지 이틀이 지난 밤, 건너 방에 누워 있던 남편이 불렀다. 이미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몰골에 꺼져가는 촛불처럼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

~ 이제 죽을려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밷어진 말에 깜짝 놀랐다. 어떤 순간은 끝나지 않는 영원한 시간처럼 느리게 흐른다.

미안했어. 천벌 받은 놈을 위해 살아줬으니 당신은 하늘나라에 갈거야. 좀 더 행복하게 살다가 와. 나 이제 갈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온 세상이 멈췄다. 관 속의 침묵처럼 시간도 죽었다. 남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따뜻했다. 두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감겨 내렸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가슴 통증에 숨이 막힌다. 하지만 그녀에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소리내어 울 수만 있다면 숨이라도 쉴 수 있으련만.......한 많은 그녀의 한숨과 눈물은 이미 고풍저수지를 채운 지 오래였다.

폐허로 방치된 주택
폐허로 방치된 주택

한센인 정착마을 영락원의 탄생 배경

송은광, 김현욱, 정순석 목사의 헌신

주님, 나는 이곳에 있으나 내 몸이 나병이 옮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저는 진정 예수님 사랑이 없사오니, 제게 주님의 그 크고 깊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죽으면 죽으리이다.” 영락원으로 들어 온 30대 초반 정순석 목사는 이렇게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했다.

영락원은 운산감리교회 송은광 목사가 19544월 사람들이 살지 않는 운산 용현리 강당골 깊은 골짜기 땅을 기증하면서 한센인들이 모여들며 만들어진 정착촌이다. 당시 운산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 송 목사는 운산에서 목회활동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뒤 운산성결교회 김현욱 목사에 이어 정순석 목사가 그 뜻을 이었다. 장 목사는 나환자가 주는 밥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즐겁게 먹었다. 교회는 천막이고 마을사람들의 집은 움막이나 판잣집이었다. 그들은 죽기만을 기다리는 몸으로 삶의 의지가 전연 없었다. 정 목사는 그들을 격려하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자립의 의지를 심어줬다.

정 목사는 주민들과 함께 먼저 식량자급을 위해 비탈진 황무지를 개간했다. 천박한 땅이지만 조금씩 작물이 자라고 소출도 생겼다. 한센인들에게 살아보자는 의욕이 싹텄다. 절망을 딛고 일어 선 마을사람들은 서로 합의하여 천막교회를 헐고 돌과 흙으로 아담 한 교회당도 지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은 대부분 국유지였으므로 불안했다. 정 목사는 그들에게 땅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가 교회와 지인들을 찾아가 영락원의 형편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받은 지원금으로 국유지를 불하 받아 가정마다 땅을 분배했다.

어는 날 정 목사는 신문을 보다가 한센인 정착촌을 지원하는 한미재단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밤을 새워 기도한 후 아침 첫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눈물로 호소한 그는 마을주택 30동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내려왔다.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1967년 준공식 날 한미재단 대표와 서산군수가 와서 축사하고 마을 사람들을 격려했다.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경쟁적으로 펼쳐지던 때였다. 군수가 나환자촌 사례를 중앙본부에 보고했더니, 청와대까지 알려져 KBS인간 승리의 제작팀이 내려와 정 목사와 주민 대표들과의 대담과 나환자촌을 전경과 그들이 일하는 모습 등을 촬영하고 방송하기까지 했다.

영락원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충남도지사의 보건향상 공로상(1971), 보건사회부 장관상(1974), 기독교 구라상(1975), 서산 라이온스클럽 봉사상(1976), 특수지역 목회공로상(1977), 크리스천 라이프사 봉사대상(1980) 등을 수상했다. 영락원은 새마을운동의 성공적 사례가 되어 당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정 목사가 60세가 되던 1981년 신자들과 함께 밭을 갈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가서 과로로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이제 하늘나라에 와서 안식하라고 부르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초창기 한미재단에서 지어 준 주택모습. 집단 수용소 형태의 주택 모습
초창기 한미재단에서 지어 준 주택모습. 집단 수용소 형태의 주택 모습

잊혀져 가는 영락마을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지역사회

현재 영락원에는 20가구 3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7년 전인 2015년에 비해 14명이 줄었다. 급속히 소멸되어 가고 있는 마을중 하나다. 주민들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다.

마을공동재산으로 경로당과 마을회관으로 쓰는 건물이 1동이 있고 창고 1동과 폐허가 된 빈집과 축사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한센인 피해사건 피해자들은 2012년 1월부터 국비로 15만 원씩의 생활지원비를 지급받고 있다. 시에서는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2008년도에 심야보일러를 설치하였고,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기초생활수급자 19세대에 단열, 보일러 교체공사와 경로당 개보수사업 2,200만원 들여서 진행했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흘렀다. 기자가 찾아 간 마을에는 곳곳에 방치된 축사와 홀로 살던 한센인이 사망하면서 늘어만 가는 폐가옥이 소멸되어 가는 마을을 대변하고 있었다. 유일한 마을 길 전봇대에는 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돼지 축사와 관련 악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아침이면 파리떼와 악취로 문을 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축산폐수가 고풍저수지로 흘러들어 수질오염을 시킨다고 수 차례 민원도 넣고 있지만 개선되는 것이 없어요.”

마을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시청에 악취문제와 수질오염 방지를 요구해도 예산 등의 문제 때문인지 메아리로 돌아옵니다라며 하소연을 했다. 산비탈로 이어지는 좁다란 마을길로 대형 사료, 분뇨차량의 출입이 잦아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차량이 지나갈 때면 길 아래에 붙어 있는 집들은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진동하여 깜짝깜짝 놀란다.

자식들 뒷바라지하기 위해 온갖 멸시와 손가락질에도 맨손으로 밭을 일구며, 지금껏 살아 왔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이제는 다 늙어서 힘이 없죠. 땅을 매각하고 마을을 떠난다고 그 작은 돈으로 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제라도 환경이라도 개선되어 누가 와서도 참 살기 좋은 동네, 누구나 아무 편견 없이 스스럼없이 출입할 수 있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민들은 용현계곡으로부터 이어지는 둘레길이 조성되고 자연과 벗하는 아름다운 마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치유의 마을로 재탄생 되길 바랬다.

고풍저수지 전경
고풍저수지 전경

한센병...그 굴곡의 역사

낙인과 차별의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한센병은 이미 퇴치가 완료된 질병(eliminated disease)으로, 더 이상 중요한 공중보건학적 문제가 아니다. 최근 10년간(2008-17) 한센병 신환자는 매년 평균 약 5명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낮으며, 최근엔 2명 내외로 거의 사라진 질병이다.

그러나 의학과 공중보건제도는 질병을 퇴치한다는 그 자체의 목표는 달성했지만, 그 질병을 경험한 한센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과거에는 문둥이, 또는 나()환자라고 불렸고, 현재는 한센인(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낙인찍혀 차별받았으며, 사회에서 배제되고 격리되어 살아왔다. 심지어 질병에서 완치된 이후에도 사회로 복귀하지 못하고 시설이나, 특정 장소에 고립되어 살아가거나 낙인과 차별을 피하기 위하여 철저히 질병의 경험을 숨기며 살아야만 했다. 재가한센인들의 아픔은 또 다른 문제이다.

지난 세월 한센병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공포는 이들에게 강제격리와 정관수술이나 인공낙태수술을 강요했고, 한센인 가족들은 통제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동과 직업의 자유를 제한받았으며,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공공장소의 출입이 금지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일반 병원의 이용도 거부당했다. 이들은 갖은 사회적 모욕에 시달렸으며, 종종 물리적 폭력을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한센인 학살사건이 자행되기도 했다.

한센인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당사자를 넘어 그들의 가족에까지 확대됐다. 한센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낙인과 차별을 그 자녀들이 그대로 물려받기도 했다. 한센인의 자녀들은 질병으로부터 감염되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목 아래 부모로 부터 분리되어 별도의 시설에 수용되어 양육되었으며, 때때로 강제로 해외 입양 보내지기도 했다. 정착촌 자녀들은 일반 학교에서 등교가 거부되었고, 또래 집단으로부터 놀림이나 구타에 시달렸다. 결혼이나 취업에 제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낙인과 차별의 경험은 한센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그 후유증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비탈에 조성된 유일한 마을 길
산비탈에 조성된 유일한 마을 길

미신과 무지가 만들어 낸 사회적 폭력

전염병 집단의 강제격리 유혹은 현대사회에도 상존

한센병이라는 질병은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한센병을 일컫는 병명이 처음 기록된 것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1231))이다. 여기에는 대풍(大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1433))에는 대풍, 대풍라, 대풍질, 여풍, 나질, 나 등 다양한 병명으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질병을 나질(癩疾)이라고 불렀다. 1613년에 편찬된 의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이 질병을 대풍창 또는 나창으로 부르면서 이후 이 두 명칭은 의학계에서나 정부에서 공히 공식적인 병명이 되었다.

한편 19세기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질병을 가리키는 단어로 문둥이가 등장한다. ‘문드러지다"썩거나 물러서 힘없이 처져 떨어지다"의 뜻을 갖는 단어로 나병에 걸린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쓰였다. 이 질병은 1910년 한일병합을 계기로 일본식 질병명인 나병(癩病)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이 질병을 여전히 문동()으로 불렀다.

한센병은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있는 카빌국립한센병요양소에 격리되어 있던 한센병 환자인 스텐리 스타인(Stanley Stein)에 의하여 1930년대 만들어졌다. 그가 1941년 창간한 한센인 인권 옹호 잡지인 The Star: Radiating the Light of Truth on Hansen’s Disease를 통해서 전세계에 퍼져나갔다. 그는 Leprosy라는 단어가 낙인과 차별에 오염됐다고 주장하면서, 한센병균을 처음 발견한 한센(Hansen)의 이름을 따 한센병(Hansen’s disease)으로 부를 것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60년대 한국의 일부 한센병환자 역시 한센()병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본격적으로 한센병, 한센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오면서 공식적인 법률 용어로 자리 잡았다.

한센병은 1940년대 중반 이후 개발된 화학제제의 발전과 1980년대 도입된 MDT(Multi-Drug Therapy)라는 효과적인 치료방법으로 인하여 조기 치료와 완치가 가능해졌다.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후유증이 거의 남지 않는다. 특히 한센병 치료제인 리팜피신 1회 복용시 한센병의 전염성은 사라지기 때문에 진단 즉시 전염성의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낙인과 차별이 발생하는데 중요한 요인이었던 전염성후유증이 치료제 등의 발전으로 사라진 것이다.

옛 영락분교 모습
옛 영락분교 모습

나환자 강제격리의 시작은 조선 총독부 위생국

한센병의 병인으로서 세균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이후이다. 일본은 1897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제1차 국제나회의에 일본인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브로(北里柴三郎,1853-1931)와 일본인 피부학자인 토히 게이조(土肥慶藏,1866-1931)가 참석하면서 인종주의적 세균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병환자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적대 분위기는 당시 일본에도 그대로 전해졌고 더욱 강화되었다. 탈아입구(脱亜入欧, 중국과 조선을 '나쁜 친구'로 규정하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가자는 주장)를 꿈꾸는 일본에게 있어 일본이 나병 유병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은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은 1909나예방법에 관한 건(癩予防スル)이라는 법에 의하여 부랑나병환자를 강제격리를 시작했다. 1915년에는 미츠다 겐스케가 원장으로 있던 공립나요양소인 전생원(全生院)에서 결혼을 원하는 환자들에게 단종수술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더 나아가 시설에서 저항하는 환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징계검속권이 나 요양소 원장에게 부여됐다.

우리나라의 경우나예방법안(癩豫防法安)를 만든 정치인이었던 야마네 마사츠쿠가 19104월 조선 총독부 위생국 고문으로 오면서 일제에 의한 조선의 나병 관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에 19162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을 공포하였고, 초대원장으로 아리카와 도오루(蟻川亨)를 임명했다. 조선 총독부는 나환자수용에 관한 건(癩患者收容関スル)에 의거하여 각 도의 경무부에 노상이나 시장 등에서 배회하는 병독전파의 우려가 있는 나병환자들을 수용하라는 조회문을 보냈다. 이렇게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는 나병환자에 대한 강제격리를 시작했다.

기독교 구라상 수상 관련 1975년 23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
기독교 구라상 수상 관련 1975년 23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

부랑 나환자를 양산한 조선총독부

전염병 환자의 농수산업, 상업 등 경제활동 금지

일반인들은 나병의 후유증인 외모의 변형은 건강인의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조선사회에서도 나환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여 부랑하면서 구걸로 생계를 이어갔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한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환자의 집단화와 부랑 및 구걸 행위는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대규모의 부랑나환자의 등장은 나환자 치료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서양나병원과 소록도자혜의원의 설립 이후에 나타났다.

더 정확히 말해서는 대규모의 부랑나환자의 등장은 1917년 총독부에 의한 노상이나 시장 등에서 배회하는 나환자에 대한 강제격리가 시작되면서 1920년경부터 발생한 새로운 사회현상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다른 여러 공중보건학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환자 수용소를 설치한 데에는 나병을 관리하겠다는 이유보다는, 서양나병원을 운영하는 서양선교사들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렇다면 나병환자들은 왜 갑자기 1920년대부터 도시로 몰리기 시작했는가? 전통적으로 한반도 남부 지방은 나병 유병율이 높은 지역으로, 북쪽으로 환자수가 줄어들다가 이북지방은 나병환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20년대 나병환자들은 남부 지역의 광주, 부산, 대구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세도시는 모두 1910년을 전후로 서양선교사들이 설립한 나병원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서양선교사들이 설립한 나병원에서 나병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자 지방에서 많은 나환자들이 이 세도시로 몰려들었다. 한편 1920년대는 나환자뿐만 아니라 식민지 농업수탈의 결과 농촌빈민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는 현상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나 환자의 격리문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일본 총독부가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전염병 환자의 경제생활을 금지시킨 데에 원인이 있다. 19242월에 개정되고 192861일에 시행된 전염병예방령(조선총독부령 제3)82항에는 전염병 환자는 업태상 병독 전파의 우려가 있는 업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전염병환자의 농업이나 어업, 상업 등 모든 경제활동을 제한할 수 있는 내용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상당수의 나환자들이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고 가난한 계층의 환자들은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가 다른 식구들에게 부담으로 작용되기 때문에 스스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 예전에 없던 부랑 나환자가 발생한 이유다.

최근 축산 악취로 주민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축산 악취로 주민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해방 후 치료제의 등장과 나환자 격리정책의 변화

1940년대 초반부터 각국에 시험 사용되었던 디디에스제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용되지 못하다가 1945년 해방 이후에야 미군정을 통하여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디디에스제와 같은 효과적인 화학치료제의 개발과 등장으로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나병은 치료가능한 질병으로 간주되었고, 당시 손창환 보건사회부 장관은 1959년 담화에서 디디에스제로 나병을 지속적을 치료하면 근치할 수 있기 때문에 나병환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나병이 치료가능하다는 보건당국의 인식의 변화는 국가재건회의 의결에 의하여 196329일 개정되고 312일부터 시행된 전염병예방법에 반영되었다. 보건당국은 전염병예방법에서 강제격리 조항 등을 삭제했다.

그러나 모든 음성환자들이 모두 퇴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기간의 치료 혹은 수술이 필요한 환자와 또는 무의탁한 고령자의 경우는 음성일 경우에도 입원시켰다. 퇴원이 가능한 경우는 균검사에서 음성으로 판명되고, 이동능력이 있는 자로서 행선지가 명확한 사람에게 한정시켰다. 즉 음성환자일 경우에도 장애나 노동력의 상실, 또 다른 의료적 관리가 필요하여 사회복귀가 어려운 사람이나, 돌아갈 곳이 없어 부랑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퇴원할 수 없거나, 계속 입원할 수 있었다.

WHO는 퇴원 기준을 세웠는데 균음성전환 후 나종형나 환자는 추가적으로 36개월 동안 균이 다시 검출되지 않는 자, 그리고 결핵양형나의 경우는 6개월, 부정군나의 경우는 2개월 동안 추가적으로 균이 검출되지 않는 자들의 경우 퇴원이 가능하게 했다.

당시 퇴원이 결정된 음성환자들이 모두 강제적으로 나환자촌으로 보내진 것은 아니지만, 나환자촌으로 가는 것은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사회로 복귀한다는 것은 낙인과 차별을 감내해야한다는 것으로 일상의 모욕뿐만 아니라 취업의 어려움, 인간관계 형성의 어려움 등과 같은 다양한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무지이지만 농사를 짓고 주거할 수 있는 땅과 소량의 식량을 정부나 교회, 원조단체에서 제공하는 정착사업은 준비 없이 사회로 내보내지는 음성환자들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장기간 사회와 단절되어 격리되었던 환자들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제대로 된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상태였다.

정착촌들은 1970년대 초반부터 전업형 축산을 통해서 소득기반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1980년 전후에 이르면 대부분의 농장들이 축산업을 통해서 일반 농가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정착촌들이 축산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이들이 다른 산업에 종사하거나 다른 직업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고, 축산업은 일반 농가들과의 경쟁을 피하고 정부의 지원에 의존할 경우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한센인 정착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 거의 모든 정착촌이 축산업에 종사하게 만든 것이다.

정부의 정착사업은 크게 2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계획되고 실행됐다. 첫 번째 목적은 음성환자들을 퇴원시킴으로써 강제격리정책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퇴원한 음성환자들이 다시 거리에서 부랑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사회복귀 이후에도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착사업은 예산이나 사전 준비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여러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 중의 하나가 정착촌이 형성되는 지역의 지역민들의 반발이었다.

한센인들이 키운 축산물은 제값은커녕 판매조차 여의치 않았다. 정성껏 키운 닭을 여미장에 팔았다고 하여 경찰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정부는 한센병은 전염성이 낮고 치료가 되는 질병이라는 홍보활동을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실제 관리 체계는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더욱 큰 문제는 정착사업에 있어 정착촌이 만들어지는 지역의 지역민들을 충분히 설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정착촌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지역민에 대한 설득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정착촌이 형성되는 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역민의 한센인과 정착촌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유지되는 이유가 되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음성환자 정착사업에 있어 지역민을 설득하는 작업의 부재는 정착촌을 둘러싼 사회문제를 야기했으며, 음성나환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유지시키고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낙인과 차별은 환자 본인을 넘어 자녀에게도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음성나환자 자녀의 공학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정부나 학교에서는 음성환자의 자녀는 환자가 아니라고 주민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같은 환자 자녀 공학반대 운동에 대한 교육청의 중재로 자녀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사례도 소수 존재하나 대다수의 사례에서는 공학에 실패하고 정착촌 내에 분교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서산 영락원 분교 설치도 그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초등학교를 넘어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불거졌다. 음성나환자 자녀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심한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음성나환자 자녀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나가서도 지속되었다. 2005한센인 인권실태조사는 자신의 자녀가 겪은 폭력 경험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담고 있는데, 응답자의 9.2%가 육체적 폭력 경험이 있으며, 17%가 언어적 폭력의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결혼에 있어서도 많은 음성나환자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듯 나균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가의 나병관리사업의 결과 피해를 입은 것은 나환자 자신에 그치지 않았다. 환자의 가족, 특히 자녀에게도 피해가 돌아갔다. 이러한 피해는 강제격리가 폐지되고 사회로의 복귀가 이루어진 다음에도 지속되었다. 그 결과 정착촌의 음성나환자와 그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민들 역시 피해의식을 갖게 되어, 이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었다. 물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음성나환자이지만 지역민들 역시 전염의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 결과 음성나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폐허로 방치된 주택
폐허로 방치된 주택

한센인 정착촌의 남은 과제

치유의 마을로 재탄생 되길 바란다

한국의 한센병은 퇴치가 완료된 질병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75세를 넘어 선 대다수의 한센인들의 고령화는 새로운 정책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신환자의 급감과 한센인의 고령화라는 변화에 따라 정부의 한센병관리사업도 2005년도부터 변화하게 되었다. 정부의 한센병관리 정책이 노인복지적 성격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때 축산업 중심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루었던 한센인 정착촌은 1980년대 말 시장개방 등으로 축산농가가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한센인 정착촌은 일종의 특수지역으로 간주되어 무허가 건축물과 시설에 대한 단속이 거의 없었다. 이는 정착촌의 축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이유이자 동시에 생활환경이 열악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특수한 경로에 의하여 형성된 정착촌들은 초기에 토지와 건물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법적 요건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토지에 있어서도 제대로 된 재산권을 행사 못하는 경우가 많고, 주택 및 축산시설 역시 무허가 시설이 대부분이다.

특히 정착촌에서는 축산시설에서 나오는 오폐수에 대한 환경규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위생문제가 심각하다. 현재 정착촌은 축산농가의 쇠퇴와 고령화로 인하여 빈 축사가 방치되어 언제라도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정부와 지역사회는 보살펴야할 존재이자 위험한 존재라고 규정지은 이들에게 보호, 예방, 치료의 수단이라며 자연스럽게 강제격리를 강요했다. 이는 일제라는 식민권력이 강제적으로 이식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제도를 경험하고 내재화한 우리사회가 주도적으로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불편한 진실은 가면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강제격리는 사회적 타자를 위한 보호, 치료, 교정의 공간이 애초부터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신과 무지에 더해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단종, 낙태 등이 강제했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겼다.

그럼에도 영락마을 사람들은 영락마을이 사라지는 마을이 아닌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치유의 마을로 재탄생 되길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이 취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글 싣는 순서>

소록도, 아픔의 땅에서 치유의 섬으로

사라지는 마을...서산 한센인 정착촌 영락마을

논산 한센인 정착촌 성광마을의 눈물

한센인 정착촌 변화, 그 성공사례를 보다

한센인 정착마을의 현황과 미래 - 한국한센총연합회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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