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 기획】사라지는 마을...한센인 정착촌을 가다

43년 소록도를 보살핀 치유의 ‘두 천사’와 소록도
43년 소록도를 보살핀 치유의 ‘두 천사’와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찍힌 사회적 낙인은 자녀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부모가 한센병을 앓는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진학은 물론 직장, 결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고통의 대물림을 막는 방법은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는 것밖에 없었다.

한센인의 평균 연령은 78.1세로 이 중 절반 이상(54.2%)이 독거노인으로 산다. 10명 중 8명 이상(83.4%)은 자녀가 있었지만 47.5%는 자녀와 따로 살고 연락도 하지 않는다. 따로 사는 일반 노인 비율(7.9%)과 비교하면 현저히 높은 수치다. 특히 정착촌에 사는 한센인 10명 중 6(64.3%)은 자녀가 있음에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한센인 2세들은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는 뜻의 미감아로 불리며 성장했다. 교육의 기회도 제한적이었다. 일부 학부모들의 거센 반대로 한센인 자녀들은 일반 학생들과 분리돼 교육을 받았다.

일부 한센인들은 경제적 이유로도 자식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자신을 부양할 자녀가 있을 경우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탈락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한센인들의 한 달 수입 평균은 60여만 원에 불과했다. 대부분 월 15만 원의 한센인위로지원금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과거 한센인 정착마을은 낙인과 차별에 고통받았다면 현재는 고령화와 경제활동의 중단으로 인한 경제 문제에 고통받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고통은 자녀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 한센인들은 국가와 지역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본 취재는 인권침해로 인하여 피해받은 한센인의 인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련의 제도적 노력의 실제 효과를 분석하고, 동시에 그러한 제도적 노력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한센인들이 가진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사회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소외된 이들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지에 대한 심층 취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이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정당한 구제나 보상을 할 수 있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지원 방안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해소를 위한 정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탐사취재를 진행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소록도, 아픔의 땅에서 치유의 섬으로

사라지는 마을...서산 한센인 정착촌 영락마을

논산 한센인 정착촌 성광마을의 눈물

한센인 정착촌 변화, 그 성공사례를 보다

한센인 정착마을의 현황과 미래 - 한국한센총연합회장 인터뷰


소록도(小鹿島). ‘아기 사슴’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다.
소록도(小鹿島). ‘아기 사슴’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다.

소록도(小鹿島). ‘아기 사슴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는 천형(天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한센병이라는 단어로 각인되어 있다.

소록도는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600여미터 떨어진 섬이다. 면적은 4.42에 불과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과 빼어난 해안 절경을 자랑한다.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함에 따라 소록도는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소록도가 한센인의 섬이 된 것은 1916년 일본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국립소록도병원 전신)을 설립하고 100여 명의 한센인을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부터다.

한센병 환자 치료 모습
한센병 환자 치료 모습

한이 서린 부두 제비선창 폐쇄

자유와 평등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선물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54일 소록도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중앙운동장에 모인 환영 인파를 축복하고, 행사장에서는 참다운 화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강론으로 원생들을 위로하였다.

교황 방문과 관련 소록도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1984년 당시 이름 없던 소록도가 교황 방문 예정지로 관심을 끌자 미국 NBC 방송은 소록도를 사전 취재하다가 부두가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미국 전역에 알렸다. 전염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부두를 따로 사용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보도는 국립소록도병원장의 마음을 움직여 제비선창을 폐쇄하도록 만든 것이다.

예전 소록도는 강제 수용시설이었다. 세상은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한센인들을 이곳에 철저하게 격리시켰다. 모든 것을 잃고 부모와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은 한센인들은 배를 타고 소록도로 왔다. 제비선창은 소록도로 들어오는 한센인들이 내리는 부두였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사건은 엄청난 정신적 전환을 가져왔다. 한센인들은 직원들과 같은 배, 같은 부두를 이용하게 되자 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다. 그래서 한센인들은 제비선창 폐쇄를 교황의 선물로 여긴다. 교황 방문 이후 소록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정부 지원도 늘었고,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990년대에 태풍이 소록도 북쪽 해안을 강타한 뒤, 제비선창은 부서진 채 과거의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자유와 평등, 이것이 교황의 방문이 남긴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수탄장 모습
수탄장 모습

일본이 1930년대 제정한 나병예방법

강제 격리 조치 1990년대까지 이어가

일제강점기인 1916, 전국적으로 "나요양소(癩療襄所)"를 짓게 한 총독부령이 내리면서 여러 곳에 한센병 치료를 위한 보호시설이 생겨났다. 그 당시 나균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이런 종류의 치료방법이 개발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때 소록도에도 이미 나환자 치료를 하고 있던 소록도 자혜의원이 있었고, 소록도는 본격적인 한센병 요양소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고, 초대 원장은 원생들에게 일본식 생활을 강요하는 등 환자들을 많이 억압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이 모였던 전남 고흥군 소록도 자혜의원(현 국립소록도병원)과 여수 애양원 두 곳에서는 단종(강제불임) 수술, 낙태, 강제노역 등의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해방 전 소록도에 강제 수용됐던 인원은 약 6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정부는 일제강점기 때 시작된 한센병 환자 강제 격리 조치를 199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 갔다.

일제강점기 당시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라는 원장은 자기 동상을 세우게 하고, 매월 하루씩 보은 감사일이라는 절기를 만들어 참배를 강요했다. 결국 스오 원장은 1942년 원생인 이춘상(李春相)의 칼에 죽었다. 이춘상 씨는 사형 판결을 받고 이듬해 처형당했다.

여수 애양원
여수 애양원

학살과 인권유린의 현장

근심()과 탄()식의 수탄장

1945821, 원생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병원과 협상을 하러 나온 원생 대표들을 병원 측이 함정을 파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생존자는 90명 중 6명에 불과하다. 소록도에 위치한 소록도 자료관과 한센병 박물관의 자료에서 당시 90명 중 84명 사망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한센인 학살과 차별의 역사 중 가장 큰 아픔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건 현장이었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날을 기리기 위한 애한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6.25 전쟁 당시에는 공산군이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학살하는 일도 있었고, 1957828일에는 경남 사천군 서포면 비토섬에서 섬 개간권을 둘러싸고 최소 28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주민들에게 학살당한 사건이 벌어지는 등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다.

한센병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아예 기록상 호적 자체가 지워지고 자동으로 소록도 등에 끌려가다시피 격리되기도 했다. 실제로 11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이 한센병 판정을 받아 소록도로 혼자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한 아버지의 실화도 있다.

한센인 격리 지역 및 시설에서, 한센인이 임신했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강제로 낙태하는 게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악습이었다. 이렇게 낙태된 일부 태아들의 시체, 그리고 시설 내에서 사망한 성인 한센인 남성의 시신은 해부되어 장기들이 각종 포르말린에 보관되었다.

소록도에서는 한센병 환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나마도 강제 낙태의 위기를 피하고서 간신히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수직 감염으로 전염되지는 않기에 아이들은 정상인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전염을 막기 위해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생이별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1년 중 단 하루만 유일하게 체육 대회라는 명목으로 상봉 기회가 있었다.

소록대교 끝의 주차장에서 중앙리로 가는 길목은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불리는 근심()과 탄()식의 장()소이다. 과거에 이곳에는 기다란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부모와 자식이 목소리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통

'소록도 강제격리' 한센인 가족 62, 일본에 보상청구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한센병 격리정책으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단종 수술, 낙태, 강제 노동 등의 인권침해를 겪은 한센병 환자의 가족들이 지난 4월 일본 정부에 보상을 신청했다.

지난 2017현대사의 비극인 한센인 단종(斷種·정관 절제낙태 조치에 국가가 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한민국 대법원 판단이 나온 후 5년만이다. 당시 한센인연합회는 배상을 거부하는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다. 대법원은 한센인들에게 시행한 정관·낙태 수술은 동의·승낙이 없었다면 헌법상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 태아의 생명권 등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한센인들의 임신과 출산을 사실상 금지해 자손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뤄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인격권 및 자기결정권, 내밀한 사생활의 비밀 등을 침해하거나 제한했다고 지적했다.

여수 정착촌 ‘도성마을’ 전경
여수 정착촌 ‘도성마을’ 전경

정착마을, 고령화로 폐가·폐축사 늘어가

정부 지원 월 17만 원뿐공공 주거시설은 운영 부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60년대, 당시는 군사정권이 한센인 정착사업을 펼치던 때였다.

한센인들을 지리적으로 격리하되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다는 방침 아래 한센인 정착마을을 만들었다. 처음에 강제 이주당했던 사람들한테는 집이랑 계사 한 채가 주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정부에서 지어줬다고 해서 정부막이라고 불렀다. 한 맏로 정부의 자급자족 정책은 축산이었다.

그러나 이후 국가의 관심과 지원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한센인 정착마을은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제 주민 상당수가 기초생활수급에 기대 생계를 이어가고 마을 환경은 방치 속에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정착마을의 현실이다. 자녀 세대 대부분이 외지로 나갔기 때문에 여전히 마을 주축으로 남아있는 한센인 1세대는 고령화, 독거노인 문제 등으로 해결이 요원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1920년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던 국내 한센병 환자 수는 의료 환경의 비약적 발전으로 급감하며 이제 9,000여 명으로 줄었다. 모두가 한센인 정착마을, 나아가 한센인의 존재 자체를 잊히게 하는 요소다.

그러나 한센인들은 한센인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정착마을 한 주민은 한센인 1세대가 사라져도 2세대의 삶은 지속되고, 한센병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책임감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3년 소록도를 보살핀 치유의 두 천사 

마리안 그리고 마가레트 수녀님

 

마리안 그리고 마가레트 수녀님
마리안 그리고 마가레트 수녀님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두 수녀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 그리고 마가레트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 날은 20115월이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다.

하지만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다.

소록도 사람들은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며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되어 살아 온 세월, 일흔 할머니가 되어 떠났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던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외로운 섬, 버림의 섬, 건너의 섬에 두 성녀가 다녀가셨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보살핀 두 수녀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치유의 땅이 되게 했다.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본국 수도원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소록도가 그리워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는 수녀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 취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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