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도 없는 영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를 위한 추모제 개최

서산 지역 2000여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지역 읍면동 2,000여명의 한 맺힌 영혼이 68년만에 고향을 찾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회장 정명호)는 지난 8일 서산시 문화회관에서 제67주기 합동 추모제를 개최하고,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보도연맹 관련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날 유족들은 지난 68년 동안 부모, 형제의 장례조차 치루지 못했고, 제대로 된 제사밥 조차 올리지 못했던 죄를 빌며,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은 유족회만의 일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며 “서산시에서 이렇게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편집자 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100만

전쟁기의 한반도, 인권유린의 전시장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그도 적군이 아닌 정부에서 자기의 국민을 이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배경에는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김구 선생과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를 넘었고, 당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등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 참극을 불러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100만이 넘는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학살을 감행했다.

학살희생자는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좌익경력자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빨지산 활동지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 등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중에는 김구 선생 측 독립운동가 출신 등 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포함됐다.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출신 허경(1918년생) 선생이 그런 인물이다. 허경 선생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홍성군 갈산면 갈산보통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고 서울 경성실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7년 2월 일본 교토의 5년제 경도중학 재학중 독립운동의 이유로 퇴학당한 후 귀국, 전답 20마지기를 팔아 연변을 거쳐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행적은 조선총독부 대전지원 홍성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을 받은 국가 기록원 보관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허경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10일 서산경찰서 소속 사복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된 후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아마도 1950년 7월 12일 인민군이 예산, 홍성에 입성한 사실로 비춰 군경 철수 시 대전형무소 이송 중 홍성 인근에서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산태안 부역혐의자 30여 곳에서 집단 살해

진화위, 서산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1,000여명 넘어

인민군 점령기에 자의든 타의든 희생자는 부역혐의자가 주 대상이었다. 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은 좌익에 의해 희생당한 유가족과 우익단체를 주축으로 구성된 치안대가 주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보니 개인적 갈등 관계에 있던 마을 사람들조차 희생당하는 등 군경과 치안대의 임의적 판단과 사적 감정이 개입되기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최소 1,865명의 희생자들은 1950년 10월 초순에서부터 12월 말경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집단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전쟁 발발 직후에는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대전형무소로 유치되어 살해당한 서산지역 보도연맹원은 400여명 정도, 이 사실은 1950년 8월 12일 미 병참사령부가 미8군에 보낸 통신문에 적시되어 있다. 또한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이송도중 홍성군 광천읍 오서산 폐 금광굴에서의 집단학살과 채 소송하지 못한 채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양대리 및 소탐산 일대에서 자행된 직접 학살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다 지난 이야기를 와 다시 꺼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기에...”

67년전 이야기. 다 지난 이야기다. 사람들은 지나 간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더구나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이야기조차 꺼내기 불편한 사실들.

그러나 아무리 불편해도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전 후 한국은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 보다는 단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반공이 사실상 ‘국시’로 간주되어 왔다.

‘멸균실’ 수준의 맹신적 반공주의는 한반도 남쪽을 휩쓸며 사회 곳곳에 ‘레드 콤플렉스’를 뿌리 내렸다.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는 다른 인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발생된 대규모 집단학살과 뒤이어 정착된 맹신적 반공주의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른다. 인권과 정도보다는 편법을 쫒고 기만도 서슴지 않는 인명 경시 풍조, 양심을 백안시하는 극단적 잣대인 이데올로기, 친일청산의 어려움, ‘빨갱이’라는 단어로 국민을 이간시키는 정치인 등이 그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100만 명 민간인 학살은 이렇듯 우리 사회를 불구로 만들어 놓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민간인 집단학살은 국가가 주권자인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불법 살해한 논리 모순의 국가범죄다. 진실규명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일이며, 집단학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을 통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민간인 학살의 기억과 고통.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67주기 서산 합동추모제는 이미 가신 2000여명의 영령들이 우리들 후손에게 “너희에게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다”는 또 다른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서산시 민간인 희생자 읍·면 현황

읍면

희생자수

사건명

비고

서산읍

166

부역혐의사건

 

고북면

97

보도연맹희생자 7명 포함

해미면

164

보도연맹희생자 22명 포함

운산면

88

보도연맹희생자 3명 포함

음암면

73

 

부석면

66

보도연맹희생자 2명 포함

인지면

74

 

팔봉면

139

보도연맹희생자 4명 포함

성연면

40

 

대산읍

7

 

지곡면

111

보도연맹희생자 7명 포함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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