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인생 - 동문동 한중피부관리 최춘자(62)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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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인생 - 동문동 한중피부관리 최춘자(62) 원장
  • 김창연
  • 승인 2015.05.01 2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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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지사 세옹지마,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우리 내 인생살이는 다양하고 참으로 변화무상하다.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한국에 (시집) 오려거든 당신의 자존심 3%만 남기고 모두 버려라.”
한국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한국의 한 보석상인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내 딴에는 50% 자존심만 버리면 되겠지 하고 꺼냈던 말인데 생각 외로 더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남자 못지 않은 기개로 사업

중국에서 태어난 나는 1994년 남편을 잃고 광산산업에 뛰어 들었다. 중국 곤륜산맥에서 금광을 체굴하던 사업가로 활동했고 남자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큰 소리치며 위세도 부려 봤다.
그러면서도 해발 6700m에 위치한 광산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억척스럽게 일했다. 남자들 앞에서 큰 소리 치기는 했지만 사장이라는 위명만 갖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른 직원들 처럼 일했고 함께 힘들어 했다.
광산의 규모가 매우 컸기에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도 많은 인력들이 몰려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산병에 시달려야 했다. 심각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많은 업체가 쉬쉬하며 정해진 일정에 맞춰 작업을 진행했다. 일정 외에 산에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데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회사 직원 2명이 고산병에 걸려 생사의 위기에 처했고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에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3일 밤낮을 이동해 산을 내려왔지만 이미 직원들은 이동 도중 사망했고 슬퍼하는 가족들을 위로해 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광산사업은 그렇게 손을 떠나게 됐고 내게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때 나는 평소 알고지내던 보석상인과 상의 끝에 한국행을 결심했다.

다문화 여성으로 겪은 설움

지금부터 10년 전 한국에서 온 남편을 만나 한국에 정착했다. 내 인생이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라는 꿈과는 달리 이 결정이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경제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내게 큰 수치심을 안겨줬고 폭력도 서슴치 않았다. 그 와중에도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며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아내로써, 며느리로써 역할을 다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적적함을 달래고자 목욕탕 일을 시작했다. 남편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자 저녁시간 일을 도맡았고 이른 아침이 돼서야 일을 교대 했다.
남편은 이를 핑계로 나를 집에도 들이지 않았고 며칠을 고생해야 했다.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을 밖에서 맴돌며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결국 목욕탕에서 일하던 중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다.
“숨이 턱 막히던게 눈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숨이 막히는 괴로움에 어떻게든 숨통을 틔워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죠. 손을 넣어 억지로 구토를 유발했고 가슴이 뻥 뚫리며 피를 왈칵 쏟아 냈죠.”
의사진단 결과 내 상태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영양결핍으로 위궤양이 발전해 일어난 상황이 었다. 위궤양이 점차 심해지면서 출혈도 심해졌고 쌓였던 혈액이 역류해 기도를 막아 결국 이 사단이 났다.
며칠 병원에서 몸을 추스리고 나니 남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기 딴에는 미안했던지 집에서도 김치찌게만 365일 먹이던 짠돌이가 “갈비탕 먹자”며 병원 근처 식당으로 함께 향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정신차렸네?’라는 생각은 잠시 뿐이었다. 결국 남편이 꺼낸 말은 ‘이혼’이었다.

100만 원 쥐고 정착한 서산

남편의 이혼 요청에 결국 우리는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됐고 위자료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남편은 위증을 했다. 집안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는 등 핑계도 많았다.
법원 측에서는 내 손을 들어줬고 위자료 지급 등을 거쳐 이혼할 것을 판결 내렸다. 남편은 위자료 문제가 생각대로 되지 않자 “이혼 하지 않겠다”며 입장을 바꿨고 난 더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마음에 위자료 100만 원만 받고 이혼하기로 결정했다.

세신사에서 피부관리사까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4년 전 남편을 떠나 서산에 정착했고 본격적으로 목욕탕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청소에서 부터 세신(목욕관리사, 일명 때밀이)까지 배우고 또 배웠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음은 편하고 즐거웠다. 남들 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더 정성들여 손님을 맞았다.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전해졌는지 어느새 나를 인정해주는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세신일을 시작하며 생긴 동료도 많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나보다 앞서 일을 시작한 선배 세신사들도 많았다. 일을 배우는 입장에서 난 항상 후배였고 ‘중국 언니’였다.
하지만 점차 내 입지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중국 X’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전문사 자격증만 3개,
더 많은 자격증 취득 위해 공부

세신사로 일하면서 일에 도움이 될까 마사지를 배우기 시작했고 조금 씩 마사지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발마사지에서부터 스포츠마사지, 경락, 체형관리사, 카이로프랙틱까지 이어지게 됐다.
지금까지 따 놓은 국가자격증만해도 피부관리사, 도배기능사, 양식조리사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체형관리사와 카이로프랙틱 자격증 취득을 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모른다.
지난해에는 열심히 일한 돈을 모아 동문동에 한중피부관리를 개업했다.
큰 일은 아니지만 지역 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는 자원봉사자의 경우 50%할인도 하고 있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하고 싶다는 그녀. 그녀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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