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⑳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강아지들을 키우다 보니 성지 주변에 둥지를 튼 다른 짐승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해 집니다. 어제도 다리를 다친 들짐승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각자의 생존 방법대로 추운 겨울을 잘 버텨내길 빌 뿐입니다. 겨울은 동물들에게 혹독한 시기이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은 마음의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친한 동기신부가 많이 아픕니다. 생각해 보니 중년(?)에 접어들어서인지 여러 친구들이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위에 지치고 힘들고 아픈 분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솔직히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렇게 대부분이 겪고 있는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인간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해 왔을까요.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인 제우스의 명을 받아 만들어진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Pan(모든) Dora(선물)라는 말처럼, 제우스는 모든 선물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려 그녀를 인간 세상에 보냅니다. 상자를 절대로 열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요. 하지만 결혼 생활 도중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상자를 열었고 그 속에 있던 질병, 슬픔, 가난, 전쟁, 증오 등의 모든 악이 쏟아져 나옵니다. 당황한 그녀는 상자를 닫았기에 맨 아래 있던 희망만이 상자에 남게 됩니다. 상자에 남은 희망은 잃지 않는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이지만 불행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원하는 헛된 희망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그 옛날의 멋진 해석입니다.

이 신화와 관련하여 고통을 겪으면 바보도 현명해진다’(Malo accepto stultus sapit)는 그리스 격언이 있습니다. 물론 같은 시대에 인간이 더욱 똑똑해지는 것은 창피를 당하고 손해를 본 후이다’, ‘경험은 바보들의 교사다라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큰 교훈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전부터 있던 것이죠.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의 저자로 유명한 기원전 8세기의 호메로스도 네가 그 값을 치를 때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 플라톤도 말합니다. “그대는 저 유명한 격언의 어리석은 사람처럼 고통을 겪고 난 후에야 교훈을 배우지 말게나.”

불교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 가는 것이 인생이죠. 사람은 생겨날 때부터 고통의 세계에 머뭅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 속을 행복의 근원지로 알지만, 뱃속에서 커질수록 어머니의 장기에 눌려 어머니도 아기도 힘듭니다. 그러다 고통스럽게 태어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시밭길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리 큰 소리로 울었나 봅니다.

그리스도교도 인간 본성이 죄로 인해 상처를 입으면서 한계, 불행, 죽음이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봅니다. 인간은 본질적인 유한성과 질병의 고통을 마주하면서 흔들리기 마련인데, 이때 교차로와 마주하죠. 고통 때문에 절망과 포기에 이를 수도 있고, 고통을 성장의 기회이자 삶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가를 식별하며 신과의 만남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무얼까요? 물론 고통을 피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삶에는 불가피하게 고통이 스며들어 있고 우리는 이를 이겨 내는 과정에서 성숙해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고통을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 자신을 만나면 다른 사람까지 바닥에서 만날 수 있고 인간에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고통의 연대성이랄까요때문에 학교에서 일터에서 경쟁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시작하는 새해부터 겪는 고통이 그리 손해만은 아닙니다. 저 같은 바보도 그로인해 한 뼘은 더 성장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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