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⑱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살다보면 종종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을 해도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성탄을 코앞에 둔 이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인한 전쟁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쉽게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무뎌져가는 무관심과 무기력이 우리를 지배해 갑니다. 과연 신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이런 세상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들을 그냥 두는지 화가 나지만 그 마저도 잊혀 갑니다. ‘즐거운 성탄이라는 말을 내뱉기 민망할 정도로 어둔 그림자가 드리운 현실입니다. 한편에서는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다른 많은 편에서는 순간순간 숨 막히는 일상이 계속되는 불합리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교 초기 2세기경에도 이런 질문을 가진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총독 관저의 경비 대장이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가가 금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서슴없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행동이 그를 감동시킨 것이죠. 이 사건이 그를 신앙의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듭니다. 그는 법률을 공부한 누구보다도 논리적인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다. 묻히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믿는 것이기에,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불합리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신앙적으로 믿을 만 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세계의 지평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처럼 명언들을 남긴 17세기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사상가인 파스칼은 900여개에 달하는 메모들을 남겼습니다. 그가 깊이 묵상한 내용을 틈틈이 기록한 것들이죠. 유족과 친지들이 그런 글들을 모아 팡세’(생각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 없는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을 가진 인간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그가 재미있는 내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을 믿는다면, 신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믿는다면, 세속적인 쾌락을 잃을 수는 있지만 불신과 같은 영원한 손실은 없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내세에서 무한한 손실을 입게 된다.”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불신의 잠재적 결과를 고려할 때 신을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정보를 가진 현대인들은 이성의 신봉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좀처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반복적인 재생을 통해서 사실을 입증하려 하고, 논리를 벗어나게 되면 일단은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로 냉소적인 눈길을 보냅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불합리하게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얼마 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분을 만났습니다. 치료 불가능한 말기 암의 상태에서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려 준비하던 그는 기도와 성지순례 중에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합리한 상황에서 불합리하게도다시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론 불합리한 영역에서 뜻밖에 신의 은총을 만나곤 합니다. 그러므로 테르툴리아누스의 고백은 저의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이 우울하고 세상에 불합리한 것투성이지만, 그 안에서도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그 어떤 씨앗이 자라나 우리를 좋은 미래로 이끌 것이라는 불합리한믿음을 잃지 않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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