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⑭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10여 년 전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습니다. 혼자 한 달가량 머물렀는데, 최대한 저렴한 숙소를 구하다 보니 팔레스타인 사람이 운영하는 지역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그렇게 심한 갈등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무 때나 인상 쓰고 소리 지르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불친절하며 우울해 보이는 유대인들에게 맑은 눈빛과 미소는 남의 일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 중에 장애를 가진 분이 유독 많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손이 불편한 사람부터 여러 형태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만날수록 눈에 띄었습니다. 한 지역에 두 민족이 사는 곳에서 약소민족으로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당하는 그들의 고단한 삶에 점점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느끼는 유대인들의 피해의식이 타인을 경계하는 배경이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분노를 안고 사는 사회, 마치 한 남편을 두고 두 여인이 싸우며 같은 집에서 동거하는 모습이랄까요? 뭔가 신앙적으로 충전을 하고 싶었던 성지순례가 혼란과 아픔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화약고에 마침내 곪았던 것이 터졌고 끝없는 피의 보복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화약고인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에게도 그곳에서 보았던 눈빛들이 늘어갑니다. 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적대적인 눈빛, 언제든 상대를 거꾸러뜨리려는 살벌한 눈빛들을 자주 봅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세네카는 분노에 관하여에서 분노를 치료하는 최고의 처방은 참는 것이다’(Maximum remedium irae est mora)라고 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글에서 분노의 속성을 설명하며 예방법과 치료법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예방에 실패하여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되면, 최고의 치료제를 ‘mora’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IMF사태를 맞았을 때 많이 들어본 모라토리움(Moratorium)채무의 지불 유예인데, 이 단어의 어원이 바로 모라입니다. 우리말로 유예, 시간, 참는 것, 회피 등으로 번역할 수 있죠. 이는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선 일단 미루어 두라는 뜻입니다. 분노도 처음에 강한 충동이지만 기다리는 동안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일이 전해들은 것이나 직접 목격한 것들인데, 판단을 미루고 차근차근 살펴보면 생각했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올라오면 무조건 미뤄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분노 가득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저성장으로 취업은 바늘구멍이며 창업은 가시밭길입니다. 결혼은 쉽지 않고 육아는 더 막막합니다. 고금리·고물가·고유가의 파도도 몰려오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불안과 분노가 그득합니다. 그래서인지 차라리 화를 내십시오!”라는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마음이 더 끌립니다. 분노 자체는 자연스런 감정이기에, 괜히 참다가 병이 나거나 복수심을 불태우는 게 더 해롭다는 것이죠. 참을 인() 자 셋이면 호구가 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분노를 유발하는 호르몬은 15초 내에 절정에 도달하다가 서서히 분해된다고 합니다. 30초만 참아도 분노는 누그러지기에,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할수 있는 것이죠. 화가 나는 순간, 60초 정도 심호흡을 하고 화나는 나를 받아들이고, 그런 나를 사랑하고 마음의 평화를 선택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단 얘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누구나 분노를 쉽게 낼 수 있지만 올바른 목적, 대상, 때와 정도로 분노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말처럼 정당한 분노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의 선과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더 자주 참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저부터 오늘 화를 내기보다는 조금 더 참는 면역력을 기르면서 미소 짓는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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