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박두웅 전)서산시대 국장

 

옛 천수만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금의 창리와 간월도에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천수만 AB지구 대간척으로 지형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도 모두 바뀌었다.

간월도 갯벌 굴뻑을 보며 채 40년도 지나지 않은 빛바랜 사진들을 본다. 마을 앞 포구에 큰 중선이 새우젓을 싣고 들어오고, 비린내가 진동하는 박대와 상어를 쏟아 놓고 다시 고기를 잡으로 가는 뱃사람들의 검게 탄 얼굴도 보인다.

육수가 많으면 고기가 많다는 말처럼 내륙의 여러 하천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수로 인해 천수만은 회유성 어류의 최적의 산란장이었다.

숭어 새끼인 몰치·모쟁이’, 조기 새끼인 보걸치’, 꽁치 새끼인 황새바치’, 꽃게 새끼인 사시랭이’, 장어 새끼인 시라시’, 도미 새끼인 피데기등이 지천이었다.

겨울철에 성에에 붙어서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벌굴(벗굴)’이 제맛이었지만, 천수만 여인들은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에 맞서 굴을 까는 동안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짚신 대신 나무로 파서 만든 목신을 싣고 짚으로 엮은 깨적을 뒤집어썼다.

천수만은 낮은 수심으로 중선이 드나들 수 있는 포구는 해안인 창리와 간월도를 포함해 해미면 귀밀리의 개삼포’, 유계리의 한다리’, 양대리의 돌짱포’, 덕지천동의 덕지포’, 부석면 강수리와 송시리의 돌뿌리’, 봉락리의 노라포’, 가사리의 사도포’, 산동리의 동막포’, 칠전리와 사기리, 남정리, 기포리 포구 등이었다.

포구에는 석금정, 삿갓주막 등 열두 주막이 있어 고단한 하루의 뱃일을 마친 어부들과 서산장, 태안장을 오가는 이들의 쉼터였다. 바람이 스치며 순간 막걸리 향내와 함께 왁작지껄한 주막이 꿈처럼 스쳐 지나간다.

천수만에 날이 저무는 시간. 도비산의 그림자가 길게 눕는다.

조선지도대동여지도에는 도비산(都飛山)이라, 비변사팔도지도에는 도비산(島飛山)이라, 조선팔도지도에는 도비봉(島飛熢), 여지도의 조비산(鳥飛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산이 날아왔다거나 바다 가운데 날아가는 섬 같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철새도래지가 된 것을 보면 새들의 낙원이라는 미래의 모습을 예견한 지명은 아니었을까.

천수만은 가장 짧은 시간에 기쁨과 영광, 좌절과 고통, 갈등과 희망이 교차된 곳이기도 하다.

하루의 지친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길. 저 멀리 어머니 품 같은 도비산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