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작(竝作) 나무

지금은 농촌에서도 전기, 가스, 석유 등으로 용도에 따라 난방과 조리용 에너지를 편리하게 사용하지만 70년대까지는 대부분을 산에서 나무를 하여 연료로 사용했다. 개인적으로 산이 넓은 사람은 땔감 걱정이 없지만, 산이 없는 사람은 땔감 확보가 큰 난제였다.

그래서 산이 없는 사람은 도리 없이 멀리 있는 국공유림으로 가서 한 짐씩 해다가 때는데 겨울철에는 하루에 한 짐씩 해 와도 땔감이 항시 부족했다.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병작나무란 제도가 생겨났다.

병작나무는 산이 넓어 땔감이 넘치는 산주와 산이 없어 땔감이 아쉬운 사람이 합의하에 작업을 하는 것으로, 산 주인과의 협의로 작업할 구역이 정해지면 산야초와 잡목을 깎고 소나무의 곁가지도 한두 단계 정도를 따서 한 아름씩 모아놓으며 작업을 해 나간다.

병작나무는 대부분 가을철에 하는데 이는 벼 베기 전인 초가을이 바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산야초가 잘 여물어 실속이 있고 잡목도 낙엽이 지기 전이라 양이 많기 때문이다.

병작나무 깎기 작업을 하다 보면 여러 어려움이 있는데, 갑자기 뱀이 나와 깜짝 놀라거나 나뭇잎에 있는 쐐기도 쏘이고 땅속에 있는 땅벌 집을 건드려 벌에 쏘이는 등 이러한 공격 없이 하루 작업을 마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1주 정도 작업을 하면 웬만한 산판이 시원하게 정리된다. 2주 정도 지난 후 깎아놓은 나무가 대략 마르면 새끼줄로 묶어 산 아래 빈터에 두 더미로 쌓아놓는데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솜씨껏 더미 쌓기를 한 후 산 주인에게 한 더미를 인계하고 나머지 한 더미는 제 몫으로 결정하면서 병작나무 작업이 종료된다.

요즘은 통장에 잔고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이지만 당시의 땔감 문제는 농지 없는 사람의 식량만큼이나 중요했다. 보릿짚과 볏짚 등 영농 부산물을 모두 땠고 바쁜 영농철에 땔 나무를 집주변에 쌓아놓아야 했다. 집집마다 추녀 안쪽에 정성스레 쌓아놓은 장작 누리는 눈비 올 때에 대비한 비상금 같은 땔감이었다.

병작이란 단어는 땅이 없는 농민이 지주의 농지를 얻어 농사를 지은 후 수확한 곡식을 절반씩 나누는 제도를 일컬었는데 남의 산에서 나무를 하여 절반씩 나누는 것도 비슷한 형식이니 병작나무라 한 것 같다.

조상일 음암면 주민자치회장
조상일 음암면 주민자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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