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웅 편집국장

쓰시마(對馬) 섬에서 도난당해 한국에 밀반입된 불상에 대해 한일 간 감정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논의의 대부분은 약탈과 도난에 중심을 두고 있다. 최근 일본 NHK는 한국 문화재청이 만든 불상 관련 보고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해 “불상이 약탈된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보도하는 등 양국 언론 또한 한 치의 양보를 마다하며 자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언론의 주목을 받다보니 문화재에 대한 상식 밖의 기사도 눈에 보인다. 기자의 자질 문제이겠지만 연합뉴스는 부석사와 부석사불상봉안위가 불상 관련 인도청구서를 대전지방법원에 접수하자 “서산 부석사, 쓰시마불상 돌려달라" 라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을 ‘쓰시마 불상’이라고 기사 제목을 뽑았다.

일부 일본 주재 한국 특파원 중 몇몇은 불상을 일단 일본에 돌려주고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는 따로 논의해야 한다는 견해를 실기도 했다. 어떤 기자는 약탈 증거가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문화재에 대한 이해에 앞서 도난, 장물 등 범죄 용어들이 난무한다.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서 복장물로 결연문이 나왔다. 불상을 부석사에 영원히 정성껏 봉안함으로써 모든 중생이 현세의 화를 면하고 복을 받아 후세와 함께 극락세계에 태어나길 비는 결연문에는 1330년 2월 서산 부석사에서 봉안되었으며, 봉안자는 32명으로 그들의 이름이 낱낱히 적혀있다.

불상이 봉안되던 때는 고려말로 왕권의 부패와 권력층의 폐해가 극심했다. 원 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에서 백성들은 노예와 다름 아닌 고단한 삶을 이어갔고 권력과 결탁한 불교계도 또 다른 권력자이자 착취자였다. 이는 민중불교를 싹 트게 했고 귀족불교의 본거지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뿌리내린 지식층이 연대한 개혁운동은 신앙결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부석사 관음상의 복장물이 발원문이 아닌 결연문이며 봉안자의 이름에 천민을 포함한 서민들의 이름이 적시되어 있는 것도 다름 아니다.

그러나 부석사에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관음의 자비를 간절히 빌었던 백성들의 소박한 바램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왜구들에 의해 무참히 깨어졌다.

서산지역은 1352년부터 왜구의 침입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1370년대 서해안 일대는 초토화되어 주민들은 살육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유랑을 면치 못했다. 서산은 태종 때에 이르러 겨우 복구되었을 정도다.

<고려사>에 따르면 1375년부터 1381년까지 6년간 최소 5차례 이상의 왜구 침구가 있었다.

1352년 3월 강화에서 남하하는 왜선을 서주 방호소에서 공격, 1375년 9월 왜적이 영주(천안), 목주(천안시 목천면), 서주(서산), 결성(홍성군 결성면)을 침구했다. 1377년 4월에는 왜적이 여미현(해미면), 1378년 9월에는 서주, 1379년 여미현, 1380년 왜적의 배100척이 결성과 홍주, 1381년 9월 왜적이 영주와 서주를 침구했다.

부석사 불상은 일본 관음사에 안치됐다. 일본 관음사의 역사를 기록한 기쿠다케 교수는 일본 관음사를 설립한 고노씨는 당시 왜구의 두목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불상은 약탈 이후 683년 동안 약탈자 집안에서 전해지다 2013년 국내로 돌아 온 것이다.

대마도 전 지역에는 30~40여 사찰에 예외 없이 화상을 입은 한국 불상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문화재는 대부분 적절한 관리하에 놓이지 않고 신사나 사찰에 방치되어 장기적으로 훼손되거나 유실될 위험이 크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단순한 약탈이나 도난품이 아닌 우리의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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