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성지, 4대에 걸친 순교자 김대건 신부

솔뫼성지
솔뫼성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솔뫼성지를 방문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칭송하는 것은 소나무가 즐비한 길이다. 굽은 노송들은 고난을 상징하듯 서 있다.

고난을 상징하듯 굽은 소나무
고난을 상징하듯 굽은 소나무

 

16일 오후 4시30분(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우측 외벽의 설치 장소 인근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의 성상 축복식이 거행됐다. 축복식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177년 되는 날에 맞춰 열렸다. 이곳에 동양인 성상이 설치되는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이다.
16일 오후 4시30분(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우측 외벽의 설치 장소 인근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의 성상 축복식이 거행됐다. 축복식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177년 되는 날에 맞춰 열렸다. 이곳에 동양인 성상이 설치되는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16일 방문했을 때는 바티칸에 김대건 신부의 성상설치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솔뫼성지를 방문했다.

요즘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 전에 했던 약속과 신념들을 버리기 일쑤인데 김대건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도 나의 생명의 최후 시각이 당도하였습니다. 나의 말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중략)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며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1977년 세워진 김대건 신부의 동상
1977년 세워진 김대건 신부의 동상

 

김대건 신부의 생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 알려진 솔뫼성지는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김 신부의 신앙이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8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새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세 무렵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와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동료 최양업 부제와 외국선교사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65일 체포됐다.

18469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사제 생활 11개월만의 일이었다. 1859924일 가경자, 192575일 복자품, 198456일 성인품에 올려졌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김 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니라 최초의 서양학 유학생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나라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여 1982년에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고,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김신부 생가 복원을 결의하여 2004년 국가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김대건 신부 생가를 복원, 2005년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제 솔뫼성지는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천주교 복합 예술 공간 ‘기억과 희망’
천주교 복합 예술 공간 ‘기억과 희망’

 

20145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 사적지 제529호로 등록되었고 2014813일부터 16일까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3회 한국청년대회가 대전교구에서 개최되면서 이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솔뫼성지에서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교황의 솔뫼성지 방문 후, 이를 기념하고자 2015년부터 매년 814~15일 이틀간 프란치스코 데이 행사가 있다.

 

서판교성당 전신자 성지순례
서판교성당 전신자 성지순례

 

솔뫼성지의 특징

 

99일 토요일은 여느 때와 다르게 다른 성당에서 솔뫼성지를 방문한 이들이 많아 넓은 주차장을 차량들이 가득 메웠다.

서판교성당 전신자 성지순례가 있어서 가족단위의 많은 신자들로 활기가 넘쳤다. 엄숙함과 경건함을 뚫고 나오는 어린이들의 밝고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솔뫼 아레나(원형공연장 겸 야외 성당)에서 야외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레나라는 말은 모래 혹은 모래사장을 뜻한다. 또한 현대적 의미로는 원형공연장을 말하는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밀사들이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한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12사도로부터 이어져왔다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마지막 회유문의 정신을 본받아 12사도상을 세움으로써, 이 시대에는 우리가 바로 사도가 되어야 함을 전한다. 음악회와 연극, 야외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며, 좌석 수만 1,200명이 앉을 수 있는 장소로 2011514일에 봉헌되었다. 대형 행사 때에는 3,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 생가(국가사적지 제 529호)
김대건 신부 생가(국가사적지 제 529호)

김대건 신부의 생가에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초상이 걸려있고, 마당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조각상이 마주하고 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서 기도하던 모습을 본뜬 조형물이다.

솔뫼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을 보여주는 기념관이 있다. 한국 교회사 관련 자료도 전시하며 솔뫼가 속한 내포 권역의 천주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솔뫼성지 방문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과 화동의 모습을 담은 커다란 조형물도 눈에 띈다.

교황 방문 3주년을 맞아 2017년 성지에 건립한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의 집경당은 아늑했다.

2021년에는 천주교 복합 예술 공간 기억과 희망이 문을 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당시 아시아 청년들과 만난 자리로서 건축물은 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사목 표어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에서 영감을 얻어 꽃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꽃잎 여러 장이 어우러진 지붕 모양이 특징적이고 대성전과 미술관, 기획 전시실을 갖췄다.

야외에는 십자가의 길’, 성모칠고동산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성모칠고란 성모마리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던 7가지 슬픔과 고통을 말한다.

 

로컬푸드와 휴게시설
로컬푸드와 휴게시설

 

카페와 로컬 푸드 판매장도 있어 잠시 쉬어 갈 수 있었다.

 

해미국제성지
해미국제성지

 

문화와 사색의 순례길, 콘텐츠를 입다(5)을 마무리하며

어느덧 해미국제성지에서 출발한 성지순례가 김대건 신부로 유명한 솔뫼성지에서 마무리를 하게 됐다. 본래의 취지는 걸어서 하나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구상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좁은 도로와 농로길을 이용하고 산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하지만 위험할 뿐만 아니라 표지판와 쉼터가 부족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일부 구간은 걷기에 좋았지만, 전체를 이어서 한국판 산티아고를 꿈꾸기에는 아직 준비할 게 많아 보였다.

순례길에서 만난 누군가의 말처럼 충청도에 흩어져 있는 천주교성지의 역사적 가치는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하더라도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자체와 더불어 천주교 성당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가능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선영 기자 earth28@naver.com

 

이 취재는 2023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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