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속에 아픔이 있는 웅도 ‘유두교’의 눈물-③】

하루 두번 건널수 있는 웅도 유두교(사진 김효주 작가)
하루 두번 건널수 있는 웅도 유두교(사진 김효주 작가)

서산시 가로림만 웅도리. 이곳에는 주민들이 드나드는 유일한 다리 유두교가 있다.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져야 비로소 건널 수 있도록 출입을 허락해 주는 유두교.

웅도리 주민들은 길이 500m, 5m에 가드레일을 설치한 콘크리트 포장 다리 유두교를 건너다니며 삶의 터전을 일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모개섬과 웅도를 잇는 것은 다리 대신 징검다리와 돌다리였다.

돌살형식으로 큰 돌을 쌓아 물때에 맞춰 사람이 통행하던 때에는 외부에 나갔다가 미처 물살을 피하지 못하고 휩쓸리는 사고를 당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현재 웅도는 서산시 4개 유인도서 중 유일하게 진입로에 폐쇄형 유두교가 설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해수소통이 차단돼 갯벌퇴적 및 수산생물 감소 등 생태환경 문제가 야기됐다.

몇 해 전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총사업비 250억 원을 투입해 진행하는 웅도 갯벌생태계 복원사업(그린뉴딜사업)에 선정되면서 웅도로 들어가는 폐쇄형 유두교를 개방형 교량으로 교체할 계획이다. , 해수를 소통시킴으로써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방안이다. 웅도 갯벌생태계 복원사업으로 과거 갯벌로의 복원은 물론, 수산자원 증대 및 생태관광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됨과 동시에 주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유두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본지는 웅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다리이자 생명의 다리, 아름다움 속 아픔의 다리 유두교가 역사의 한 획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주민들의 아픔과 애환을 담아 역사에 남긴다.

_편집자 주-


웅도 유두교
웅도 유두교

삶과 죽음의 다리를 건너 사는 사람들

여학생 혼자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왔어요. 그런데 막상 웅도 다리에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물이 빨리 들어온 거지. 이때다 하고 금방 뛰어가면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물이 발목 정도 잠길 때였으니까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겠죠. 그게 오산이었어요. 물 들어오는 게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리고 미끄럽잖아요. 그냥 떠내려간 거죠. 제가 그 사실을 알고 학생을 찾기 위해 동네 형님들과 경운기 끌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못 찾았어요. 난리 났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학생이 죽었어요라고 말했다.

웅도가 고향이었다는 그분은 대부분 웅도 사람들은 대산에 집이 있긴 하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물때가 맞지 않으면 들어가질 못하니까. 또 문제는 물때가 맞지 않으면 뭍에 있는 학교에 갈 수 없으니까. 아무 때나 집에 가는 게 아니고 아침 물때도 맞아야 들어가는 거니까.

한 주민은 물이 둥글게 들어와요. 그러니 빠져나갈 수도 없죠. 옛날에는 배가 없으니 빨간색 목욕다라 타고 넘어 다녔어요. 학교 갈 때는 숲에 숨겨놨다가 여차할 때 쓰게 되는 거죠.”

그는 동네 사람이 죽어 나간 바다에서 삶과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어제 상여 들고 건넌 다리를 오늘은 상여 대신 소시랑을 들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걸어 나간 웅도 주민들이라고도 했다.

옛날에는 웅도 다리 밑에 바지락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학교 갔다가 가방만 툇마루에 던져놓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언제나처럼 바지락을 캐러 많이 다녔죠. 특히 여름방학에는 꼬마 노동자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좀 더 커서는 (고등학교) 두 개짜리 소시랑으로 바다 갯지렁이 잡아서 팔고. 겨울에는 굴 따러 다니고 김 파래 매러 다니고. 물 들어올 때까지 죽으나 사나 일해야 되는 게 섬사람들의 일상이었어요. 그러다 유두교가 자꾸 높아지면서 뻘이 쌓이니까 바지락이 사달 난 거죠.

이밖에도 할 얘기는 너무 많은데 농촌 말로 소죽 끓듯이 이 머릿속에는 와글와글한 데 막상 얘기를 하려면 터져 나오지 않는 게 더 답답하다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밤에 보면 마치 저승사자 같다는 주민의 말
밤에 보면 마치 저승사자 같다는 주민의 말

시커먼 게 돌고 돌아봐 꼭 저승사자 같어

이웃집에 초상이 나도 긁은 조개 까야 되니 슬픔을 꾹꾹 눌러 참으며 일거리에 붙어살았지. 하루 이틀이 아니잖어. 옛날 나 여기 이사 오고 나서부터는 (바지락을) 전부 다 까서 젓갈로 팔았어. 지금이야 바지락 통째 팔으니까 한결 수월하지. 다른 거는 할 수도 없었지.

하루 물 나갔을 때 긁어다가 물 들어오면은 날밤 새우면서 바다에 나갈 때까지 까야 돼. 할 줄을 모르니까. 잘하는 사람은 빨리 까서 (소금에) 저리고서 자는데 나는 손이 느리니까 늘상 피곤하게 살았지.

부모고 새끼들이고 고생 많이 했어. 중학교부터는 다 외지로 나가 다니니까 김치 보따리 지고 이고 다녔지. 일주일 먹을 거 반찬 갖고 가야 끼 때 챙겨 먹지. 물때 안 맞으면 오지도 못하잖어. 그럼 김치 없이 사는 거지. 일일이 해서 갖다 줄 수 없으니께.

밤에 어떨 때 오다 보면 무서워. 무서워서 밤에 안 들어오려고 낮에 막 어거지로 들어오려다 사고 나는 경우도 많어. 밤에 물 보면 정말 무섭지. 시커먼 게 돌고 돌아봐. 소리는 또 얼마나 컸다고. 밤에 보면 소름 돋아. 못 건너. 그 시커먼 물속으로 차 시동 꺼져 떠내려가고. 학교 갔다 떠내려가고.

맨날 선거 때만 돼봐. 유두교 막아준다고 표 찍어달라 그랬어. 근데 막상 당선되면 쳐다도 안 봐. 여기 공약 1호는 항상 다리 놔준다는 거였지.”


웅도주민들
웅도주민들

웅도 사람들, 가슴에 응어리진 눈물

부천이 고향인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6.25가 터졌어. 우리 어머니 고향이 웅도였는디 여기 데리고 와서 살았어. 그렇다고 여기가 안전한 건 아녔어. 일사후퇴때 인민군들이 평택까지 내려왔다고 하더라고.

그 당시 먹을 게 없어서 엄청 고생했어. 파래 매 가지고서 사촌 형수님에게 서산 가서 팔아달라고 해서 살았어. 근근이 죽 먹어가면서.

학교 갔다오면 뭐 먹을 게 있어? 아주 배고파서 말여. 집에 오면은 능쟁이 저린 것밖에 없었어. 쌀이 있나 보리쌀이 있나. 결국 배고파서 저 웅도 다리를 건너 당진으로 머슴살이 갔지. 섬이 멀어질까 봐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는데 어린애가 얼마나 두려웠겠어.

가서 살다 보니까 거기서는 그래도 배는 곪지 않더라고. 배부르니 집에 오고 싶어서 그냥 와버렸어. 그런데 집에 오니께 여전히 배가 고프더라고. 누나들에게 다시 데려달라고 해서 당진 머슴집에서 겨우 1년 머슴살이 채우고서 새경으로 벼 한 가마니 받아 나왔지.

벼 한가니야 금방 거덜나잖어. 다시 바지락 까서 시장에 들고 나가 보리쌀로 바꿔 죽도 쒀 먹고, 도토리 따다가 우려 섞어서 먹기도 했지. 보시다시피 여기는 섬이다 보니 논이 마땅치 안잖어. 그당시는 자다가도 배가 고파서 연신 뒤척였다니께.”

겨울 풍경 웅도(사진 김효주 작가)
겨울 풍경 웅도(사진 김효주 작가)

성애가 돌까지 물어가 버려

내 나이 8살에 바다가 있어 좋다고 부모님 손 잡고 따라왔어. 유두목이라는데 거기 와 보니까 돌다리더라고. 그전에는 물 빠지면 그냥 자갈이었지. 그 길을 밟고들 다니시더라고. 그러면서 1952년도 골이 있는 곳에 돌을 이렇게 저렇게 쌓아놓고 건너 댕겼지.

어른들은 전부 지게를 지고 대산까지 다니면서 비료도 조금씩 사고, 생활용품도 사들곤 왔어. 들어오다 이 돌다리를 건너와야 하는데 지게 무게가 무거울수록 삐뚤삐뚤하다 중심을 잃어 그대로 물로 처박혔지. 그러면 지게 위에 얹혔던 것들이 전부 다 물에 빠져 둥둥 떠다니고, 가라앉고 했어. 정말 말도 마.

그래도 돌다리는 덜하다고 봐. 그 전에 웅도 주민들은 물 나가면 바닥으로 걸어 다니고, 물 들어오면 못 다니고 그랬지. 그때는 삼베옷을 입고 다녔잖어. 옷이 물에 젖어 고생했던 사람들이 무지 많았지.

겨울에는 성애가 또 왜 그리 짙었는지. 바다가 보이지도 않았어. 바다만 물들이면 다행이게. 성애가 돌다리에도 내려 앉잖어. 그러다 물이 들어오면은 우리가 밟고 다니는 돌까지 물어가 버려. 고생했던 얘기 들어보면 숨이 막힐 정도여.”

노을진 웅도(사진 김효주 작가)
노을진 웅도(사진 김효주 작가)

나도 새끼 하나 거기다 버렸어

웅도 주민은 작은 숨을 길게 뿜으며 나도 새끼 하나 거기다 버렸어눈을 맞추지 못하고 모랫바닥을 바라봤다. 중심을 잃은 눈빛이었다. 바닷물은 썰물에 멀리 달아나 있었고, 갈매기는 가녀린 날갯짓을 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란 옛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애달픈 마음 한량없지만, 세월이 지나면 부모님을 잃은 아픔은 서서히 사라져 간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자식은 다르다. 다 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다.

웅도 다리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본 학생은 서두르면 건널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빨리 휘몰아쳐 들어올지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학생은 유명을 달리했다. 몸을 가늘게 떨며 희미하게 눈물을 삼키는 모습에 듣고 있던 필자도 덩달아 마음이 시렸다.

50여 년의 세월 동안 자식을 앞세운 바다를 보며 어떻게 삶을 연명하고 여기까지 왔을까. 슬픈 모습에서 그날의 일이 떠올려졌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웅도 다리를 건너 부모님을 보기 위해 들어오면 그 가슴은 또 얼마나 설레었을까. 세월이 얼마나 더 흘러야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미처 피어보지 못한 어린 생명들이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기를 빌어본다. 아울러 지금 필자 앞에서 숨죽여 새끼 하나 웅도 바다에 버렸다고 서럽게 말씀하시는 아주머니에게도, 저 아픔의 웅도 다리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신 수많은 유가족분에게도 부디 평안한 안식이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기원해 본다.

물빠진 웅도
신이 허락해야 들어갈 수 있는 웅도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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