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존재들의 잔상-11

요즘은 물자도 풍부하고 국가의 복지정책 덕분에 예고 없이 다가오는 상사(喪事)를 큰 어려움 없이 치룰 수 있지만 50년 전만 해도 부모 상사(喪事)는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에 대비하여 부모를 부양하는 사람들이 모여 상사(喪事)를 공동 부조하기 위해 만든 계가  바로 상포계다상포계는 15~20명 정도를 계원으로 하고 계원 중 부모가 돌아가시면 계원들이 계칙에 정해진 계미(契米)를 주는데 대략 쌀 두 말씩으로 했다. 지금은  두 말씩 모아봤자 쌀 서너 가마 정도이니 적은 금액이지만 그 당시에는 초상을 치르는데 큰 도움이 됐다.

또한 당시에는 마을 주민이 초상집에 갈 때 집에 쌀이 있으면 쌀 한 되쌀이 없는 사람은 보리쌀 한 되씩을 갖고 갔다. 이는 양식이 없는 사람을 포함하여 마을 주민 모두가 상가에서 밥해 먹으며 무난히 장례절차를 마치기 위한 마을공동체의 규칙이었다.

지금은 장례에 조의금으로 조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당시는 친분에 따라 백지 한 권양초 한 갑을 들고 가거나 빈손으로 찾아가서 정중히 조문 하는게 관행이었다.

조문객이 많을 것 같은 사람들은 상포계와 함께 팥죽계도 조직했다. 상사(喪事)는 예기치 못하게 맞게 되고대부분 황망한 상태라 조문객에게 음식 대접하기가 여의치 않았다이에 대한 대책으로 팥죽계도 조직하는 것이다.

계원이 상을 당하면 다른 계원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팥죽을 한 동이씩 쑤어 가져가고 일부 계원은 두부를 만들어 간다이렇게 모인 음식을 조문객에게 대접했던 것이다. 팥죽은 겨울철에는 데워서 먹고 여름철에는 식은대로 먹으면 되니 접대에 편리했고, 두부는 부침과 탕 등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기에  한민족 애경사에 필수적인 식품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팥죽계 얘기를 들으면 황당해 할 이야기이지만 50년 전 당시 부모 모시는 젊은이들에게는 이러한 상포계와 팥죽계를 조직해놔야 걱정 덜고 생활할 수 있었던 애잔한 풍습이었다.

조상일 서산시 음암면주민자치회장
조상일 서산시 음암면주민자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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