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이야기 : 당진원머리성지~삽교천~아산 공세리성당 편

원머리성지 순교자의 묘
원머리성지 순교자의 묘

 

당진원머리성지

 

취재를 하려고 서산에서 차로 이동하여 당진원머리성지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원머리성지를 방문한 부부를 만났다. 전국의 성지를 대부분 순례했다고 하면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가실성당(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신나무골성지, 창평지, 동명성당, 진남문, 한티순교성지까지 45.6km의 길을 23일 또는 12일로 여러 번 종주했다고 말했다. 충청남도는 곳곳에 성지가 많아 한국판 산티아고 성지순례길이 가능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려면 지자체뿐만 아니라 신부님들도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이라며 한티성지를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러 번 종주할 만큼 가고 싶은 순례길인 한티가는길은 칠곡을 넘어야 하고 산길이 험해서 중간 중간 쉼터가 있어 냉장고와 시원한 물이 비치되어 있고 공소처럼 숙소를 만들어 놔서, 한 번에 완주하기 힘든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 원머리성지는 방문할 때 이정표가 변변치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책자에 스탬프를 찍어 기록으로 보관하며 전국의 성지를 순례하는 두 분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닫혀있는 성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화장실이 외부에 있고 정자가 있어 쉬어 갈 수 있다며 행복해하는 두 분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은 전국의 성지를 순례하지만 언젠가는 산티아고를 다녀오고 싶다는 두 분의 소망이 꼭 이루기를 바라며 취재를 위해 여정을 이어갔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책자에 스탬프를 찍어 기록으로 보관하는 부부를 원머리성지에서 만났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책자에 스탬프를 찍어 기록으로 보관하는 부부를 원머리성지에서 만났다.

 

천주교 박해시기에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타 지역이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원머리 지역은 다른 곳과는 달리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육지에서 섬으로 변하는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관현의 감시를 피해 온 교우들과 현주민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교우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던 곳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두리의 변형된 말이다.

어업과 간척지 농사일이 생계의 주요한 수단이었지만 교우들은 대체로 염판과 옹기 굽는 일을 주로 했다. 이는 직업 특성상 전국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기에 교우들이 포졸의 감시를 피해 신앙을 전파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인대박해 때 이곳의 치명자들은 20명이다. 순교형식은 교수형 10, 생매장형 6, 4명은 순교형식을 알 수 없다. 순교장소는 홍주 16, 해미 2, 수원 2명이다.

이 지역 신자가 수원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이유는 무진년(1868) 대박해 때 관할 지역과 상관없이 천주교 신자들을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체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교의 연도에 따른 치명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866(병인)에는 한마티아, 양정수, 홍베드로닐라, 양명삼 최아우구스티노, 홍베드로 6명이, 1867(정묘)에는 김마리아, (), 양도미니코, 김자선의 모친, 송춘일 5명이, 1868(무진)에는 박요한, 문마리아, 박마르코, 박마티아, 최베드로, 김루치아, 김마리아, 원아나스타시아 8명과 연도 미상 양아우구스티노 1명이 순교했다.

일제강점기와 19506.25 전쟁 당시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고 박해하던 북한 인민군들은 원머리와 새터 두 공소 회장과 타 지역 신자들을 당진공동묘지에서 사살하는데 다행히도 원머리 공소 박원근 바르나바는 총상만 입고 목숨을 건지지만 새터공소 박영옥 안드레아는 총살당했다.

유영근 세례자 요한 신부는 공세리에서 태어났지만 음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932년에 사제품을 받고 충청도 감곡 등지에서 사목을 했다. 1950711일 당시 명동성당 당가였던 유신부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195010월 평북 운산 우현령에서 사망했다.

원머리 순교사적지의 신앙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무덤이다. 1868년 수원에서 순교한 두 분의 시신이 다행히 이곳 박씨 집안의 야산에 묻혀 큰 변고 없이 내려왔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묘를 관리해 왔기에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이렇게 보존된 두 순교자의 유해는 1989년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본래의 진토가 있던 원머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빈 무덤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원형을 회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이 땅이 교구에 기증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교회 공동체의 유산이 되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오는 순교자 묘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묘는 2009년부터 한국 교회에서 진행 중인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으로 인해 그 가치가 더 주목받게 되었고,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안건의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로 변경해 그해 426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예비심사 관할권 승인 교령을 받은 2차 시복 추진에 원머리 출신의 두 순교자가 대상자로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출처 : 신평 성당 제공,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695)]

 

현재 원머리성지에서는 조선시대 순교자 20명과 근현대 순교자 2명을 포함하여 22명의 치명자를 모시고 시복 시성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다.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공세리 성지

 

공세리성당은 과거 박해로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역설적으로 너무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 천주교를 믿지 않는 방문객들을 유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당 곳곳에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많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어 가는 꽃들이 화려함을 자랑하기보다 숭고한 넋을 기리는 듯하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 시대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곳으로 1523(중종 18)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초대 주임과 3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을 사목하면서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이 된 현재의 성당 건물도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여 1922년도에 완공했다.

성당 한 편에는 신유박해(180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3형제가 나란히 잠들었던 묘소가 있던 곳이다.

공세리 성지 ·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 사업을 시작해 200210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8월에는 3형제 순교자 묘가 있던 곳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28위 순교자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했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셨다. 2008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성당옆쪽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걸을 수 있었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을 지키기라도 하듯 350년 된 팽나무가 무심하리만큼 아름답게 펼쳐진 파란 하늘 아래 그늘막이 되어 주고 있었다.

오래된 거목이 오직 신앙을 지키고자 처절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순간들을 증언해주듯 묵묵히 서 있다.

 

여사울성지
여사울성지

 

여사울성지

 

아산 공세리성지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에,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에 있는 여사울성지에 들렀다. 고즈넉하고 따스한 햇살이 인상적이었다. 멀리 서해대교가 보였다.

여사울 지역은 충청도 천주교회의 출발점이자 초창기 교회의 중심지라고 알려져 있다. 이존창의 집안에서 박해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두 방인사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가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 사제성소의 못자리로도 평가된다.

여사울이란 말의 뜻(서울과 비슷하다. ,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사울이 속한 충청남도 서북부 지방은 그 당시에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넓은 내포평야가 펼쳐져 있는 교통의 요지뿐만 아니라 곳곳에 포구(浦口)가 발달한 상업유통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충청도, 전라도의 세곡(稅穀)을 서울 도성으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의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획득한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여사울은 충청도 지방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여 내포(內浦)의 사도(使徒)’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태어난 곳이자 그가 천주교 전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곳이다. 이존창은 1785년경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후, 고향 여사울 뿐만 아니라 예산을 포함한 내포지방 전체로 교세를 확장시켜 갔다. 그 결과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존창은 호서(湖西) 지방 천주교의 괴수로 지목되어 관가에 체포되었는데, 배교를 하여 석방된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향 여사울을 떠나 충청도 홍산(鴻山)을 거쳐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이주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여사울 신앙공동체는 이존창이 입교시킨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 부자에 의해 유지되어갔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이존창, 김광옥 등이 순교하고 김희성이 경상도로 이주해간 후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제공해준 순교성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1798~1840)·홍영주(洪永周, 바오로, 1801~1840) 등이 신앙생활을 하는 등 신앙의 맥이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1984년 대전교구 신례원(新禮院)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여사울 이존창의 생가터를 찾아 십자고상과 성모상 등 천주교 유품을 발굴했으며, 19871월 생가터 축복식을 갖고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사적지로 조성했다. 20081, 대전교구는 여사울 공소를 신례원 본당에서 분리시켜 독립된 여사울 본당 겸 성지로 설립하고, 장동준 라파엘 신부를 초대 주임사제로 파견했다. 200812월 충청남도는 여사울이존창생가터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했다. 이후 대전교구는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했다. 순교자 기념성당은 20101016일 봉헌식을 가졌다.

 

배나드리성지
배나드리성지

 

배나드리 순교사적지

 

배나드리 순교사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삽교천가에 형성된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하여 배나드리라고 했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배나드리 인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순교자는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이다. 그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삽교읍 용동리)에서 태어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천주교 신앙을 배우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여 살다가 1739년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청주를 거쳐 해미로 이송되어 63세로 순교했고, 20148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1817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체포해 간 신자는 20-30명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했으며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1880년대 초까지도 신자가 한 집도 없었다고 하니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들마저도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정되고 이 또한 그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짐작케 한다.

취재를 위해 방문했을 때는 문이 닫혀 있었고 인적도 없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김선영 기자 earth28@naver.com

 

 

이 취재는 2023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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