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춘 작가
박영춘 작가

꽃들이 웃는다. 대지가 웃는다. 대지는 꽃을 통하여, 꽃들은 화사한 햇살을 통하여 마냥 웃는다. 푸른 숲 대신, 괴물 같은 아파트의 밀림 속에서 흉기가 되기 일쑤인 자동차의 홍수에 떠밀리어 허겁지겁 사는 도시 사람들. 그들은 마치 문명의 슬픈 노예처럼 느껴진다.

정력을 위해서라면 못 먹는 것이 없을 정도로 흉하게 마구 잡아먹는 남자들과, 외형의 미를 위해 밤낮으로 몸살을 앓는 여자들이 사는 사회를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하나. 대지가 꽃을 통해 웃고 있는 들과 산을 비디오 사진을 찍듯 빙 둘러본다.

그때서야 정상적인 생각은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공해와 황사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아픔과 슬픔을 딛고 일어나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대지를 웃게 하는 꽃들을 보면, 저들이 바로 대지의 천사라는 생각이 든다.

멀리 꽃지의 하늘이 실루엣처럼 바라보이고, 간월도의 어리굴젓 탑이 아스라이 보이는 맑은 날 작은 언덕.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풀 섶 위에 잠시 앉아 쉰다.

오랫동안 비워둔 옛집. 여기 살던 아름다운 사람들은 다 뿔뿔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빈터만 남아, 너럭바위 밑 돌샘주변에 원추리 꽃을 피우고 있다. 썩을 것은 다 썩어 구들장만 남았고 굴뚝은 문드러져 시커먼 잿더미 위에 깨진 옹기 조각만 나뒹굴고 있다.

동심시절에 늦게까지 잎이 피지 않고 시커멓게 서 있으니까 죽었다고 생각했던 감나무 한 그루만이 차마 옛집을 떠나지 못하고 골짜기를 지키고 있다. 오고가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산 계곡이다. 여기저기에서 시시덕거리고 소곤거리는 풀벌레들의 즐거운 만남의 소리만 낮게 깔려 경음악처럼 들려올 뿐이다.

곤충들의 신비한 사생활. 그들만의 즐겁고도 한편 비참한 삶. 풀 숲 동네. 거기에는 갖가지 곤충들이 나름대로 재미있게 또 한편으로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물여덟 점박이 무당벌레 암수가 장미꽃잎 촛불 밝힌 꽃방에서 짝짓기를 한다.

그런데 다른 수컷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새치기를 한다. 어떤 벌레는 짝짓기를 하면서 사시나무 떨 듯 떤다. 왜 일까? 1mm~3cm 밖에 안 되는 작은 곤충들의 신비한 사생활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색적인 자연의 드라마 한편을 감상함이다. 계곡의 옛 집터 곤충동네를 살핀다.

갑자기 동심시절에 친구들과 곤충채집을 할 때 그들의 사생활을 마냥 신기하게 관찰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베짱이를 게걸스럽게 잡아먹는 사마귀의 포악한 모습. 허물벗기를 하다가 자기 눈을 잘못 찔러서 죽고 마는 잠자리의 최후. 자기가 살기 위해 형제를 잡아먹는 벌레새끼들의 동족상잔. 거미줄을 쳐놓고 거기에 걸린 풍뎅이를 아작아작 갉아먹는 거미의 표독함.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가슴 아픈 일이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6~7년 동안 애벌레의 기구한 세월을 견뎌낸 뒤 비로소 화려한 성충으로 태어나는 곤충. 하지만 성충으로 태어난 뒤의 삶은 너무나 짧고 비참하기까지 하다.

일주일을 살든 하루를 살든 짝짓기를 위해 목숨을 거는 곤충들. 수많은 벌떼를 보라. 짝짓기를 위해 공중으로 여왕을 쫓아 하늘을 높이 올라가다가 제일 힘이 센 놈 하나만이 공중에서 짝짓기를 마치고 시체로 떨어지고 만다니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거미새끼들이 어미를 뜯어먹고 자란다니 이것이 비참함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이 잔인한 자연의 섭리인 것을 또 어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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