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성당에서 신리성지로 가는 순례길

정면에서 바라 본 합덕성당의 종탑은 쌍탑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올려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정면에서 바라 본 합덕성당의 종탑은 쌍탑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올려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서산에서 합덕성당까지 차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길에 벚나무가 양팔을 벌려 반겨 주듯 양쪽 가로수 길을 따라 서 있었다. 해미에서 출발하여 홍주성지를 거쳐 합덕성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하나로 이어진 길을 고집하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비 내리던 날,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웠던 날들을 뒤로 하고, 합덕성당 가는 길이 오늘(94)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가을의 문턱을 지나 화려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벚나무도 계절의 힘을 이기지 못하여 잎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그 슬픔은 오롯이 남아있는 자들의 것 인양,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참히 학살당해 순교하신 이들의 모습을 하나 둘 떠올리며 걷는 발걸음이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감히 인간이 똑같은 인간한테 이런 끔찍한 짓을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지만 불과 150년 남짓 된 지난 역사의 흔적들이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이런 비극적 만행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소위 깨어있던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쩌면 누군가는 지나치게 가혹한 삶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은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 지거나 또는 차마 나서지 못하고 모른 척 살고 있는 기득권층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례길을 따라 걸으며, ‘가 아닌 우리가 되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합덕성당에서 버그네 순례길로 가는 방향에 위치한 ‘느린 우체통’
합덕성당에서 버그네 순례길로 가는 방향에 위치한 ‘느린 우체통’

 

합덕성당

정면에서 바라 본 합덕성당의 종탑은 쌍탑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올려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1929년 페랭 신부가 벽돌로 고딕양식의 성당을 신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는데 3개의 출입구와 창들이 모두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고 창 아래와 종탑의 각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형의 장식을 하였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사진작가와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을 만큼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합덕성당은 충청지역 최초의 본당이다.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본당(초대주임 퀴를리에)으로 설립된 이후, 1899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성당이 되었다. 합덕지역은 한국천주교회의 창설 직후 천주교 신앙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된 이른바 내포교회의 중심지였다. 내포천주교회는 박해 동안에도 신자수가 끊임없이 늘어났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기나긴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찾아오자, 순교의 터전 위에 합덕성당을 세움으로써 순교자들의 염원이 결실을 맺었다. 이와 같이 합덕성당은 순교의 열매인 동시에 새로운 신앙의 씨앗이 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직자 및 수도자를 배출했으며, 현재 대전교구 모든 성당들의 모본당(母本堂)이 된다. 지금도 변함없는 기도와 미사가 교우들에 의해 봉헌된다.

한편, 성당자리는 1894(갑오년) 전라도 고부보다 앞서 발생한 합덕농민항쟁의 시발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성당에서 아래로 내려오다가 6.25의 참혹했던 시기에 순교하신 분들을 기리는 송덕비가 있고 좀 더 가면 200년쯤 된 고목 뒤로 합덕농촌테마공원이 보인다.

 

6.25의 참혹했던 시기에 순교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합덕성당에 세워진 송덕비
6.25의 참혹했던 시기에 순교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합덕성당에 세워진 송덕비

 

합덕제

현존하는 합덕제의 총 길이는 약 1,771m로 조선시대 당시 최대의 길이와 규모였다. 옛 합덕제 못 안에는 연이 가득하여 연꽃이 만발할 때 그 경관은 수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이 물을 대량으로 흡수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연뿌리죽이기사업을 벌여 연을 제거했는데 연을 죽이는 제초제로는 연과 상극인 칡넝쿨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기러기를 비롯해 두루미와 고니, 원앙 등 수십 종의 철새 수천 마리가 합덕제를 가득 메웠다고 하는데 철새들의 우짖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고 제방 안팎에는 벚나무 수백 그루가 늘어서 경관을 더했다는데 이 역시 수목이 무성하면 제방이 약해진다 하여 베기 시작했고 광복 후에는 일본국화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벚나무가 베어졌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 인근에 예당저수지가 축조되어 합덕제는 저수지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이후, 논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김제 벽골제의 제방이 일직선인데 비해, 이곳의 제방은 특이하게 곡선으로 이뤄져 있어 2017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원시장, 원시보 생가 터 근처의 우물
원시장, 원시보 생가 터 근처의 우물

 

복자 원시장(베드로) 원시보(야고보) 우물

이 우물은 합덕읍 성동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 출신인 원시장 베드로는 내포지역의 첫 번째 순교자이다. 1788~1789년경 사촌 원시보와 함께 입교한 원시장은 1791년 체포되어 천주 신앙을 끝까지 고백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했고 사촌형제 원시보 야고보 역시 1788년에 체포되어 청주에서 순교했다. 원시장의 생가는 온데간데없이 사촌 원시보와 함께 거주했다는 생가 터 근처의 우물만 남아 있다.

원시장(베드로)문화와 사색의 순례길, 콘텐츠를 입다(2)에서 다룬 바 있다.

 

무명 순교자의 묘
무명 순교자의 묘

 

성 손자선(토마스)과 순교자 및 교우묘역(무명 순교자의 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리의 신리 성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5에 있는 무명 순교자 묘[합덕읍 대전리]는 신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순교 역사와 관련이 있는 무덤들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직전 신리는 주민 400 여명이 모두 신자인 교우촌이었다. 이 교우촌은 밀양 손씨 집안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다른 성씨를 가진 많은 신자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흥선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1873년까지 계속된 참혹한 박해였다. 이 박해로 신리에 거주하던 신자들은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다른 지방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그 결과 박해가 끝난 후 신리는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마을로 변해있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으나 대부분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무명 순교자들로 분류된다. 신리 인근의 대전리에 형성된 무명 순교자 묘는 이런 배경 아래서 생겨났다.

옛 이름으로 말바탱이라 불리던 대전리 120-8번지에는 밀양 손씨 집안의 문중 묘가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14기가 순교자의 묘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는 1839년에 순교한 손경서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자선 등 여러 손씨 집안 순교자들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그곳에서 멀지 않은 대전리 254-8번지에는 32기의 무덤들이 있었는데 밀양 손씨가 아닌 신리 출신 순교자들의 묘로 전해지고 있었다. 두 묘역은 서로 구분되어 있으나 모두 순교자들의 묘로 알려져 있었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각각 다른 시기에 당진시 합덕읍 대전리에 있는 시립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32기의 묘는 1972년에 이장될 때 유 해가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6개의 봉분으로 합쳐 묻으면서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4기의 묘는 1985년에 이장되면서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 묘라 명명되었다. 20기의 무명 순교자 묘는 2014329일 묘지 관리 차원에서 시립 공동묘지 내에서 또 한 차례 이장되었다. 이장 시 십자가가 출토되었다.

박해 이전까지 조선에서가장 큰 교우촌이었던 신리-거더리는 1866년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피점령지처럼 초토화되고 말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교우촌의 자취가 초라한 봉분과 함께 남아있다.

 

합덕읍 신리 마을 : 신리는 간석지를 인위적으로 개답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말, 신리(新里)라 하였다. 신리는 원래 홍주군 합남면 지역으로서, 1895(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면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합남면(合南面) 하개리(下介里)와 합북면(合北面) 도촌리(島村里), 하신리(下新里)를 병합하여 그대로 신리(新里)라 해서 당진군 합덕면에 편입되었다. 197371일 합덕면이 합덕읍(合德邑)으로 승격되었다. 20121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합덕읍 신리로 개편되었다.

신리는 삽교천 서쪽에 연접한 지역으로 10m 내외의 저평한 해성 퇴적 간석지를 간척하여 만든 대평야 지대이다. 야산이 거의 없는 저평지이다. 대전리 쪽에서 남동류하는 대전천이 평야 가운데를 직선으로 흘러서 삽교천에 유입되며 예당평야의 일부이다. 신리에는 원신리, 서뜸, 동뜸, 윗뜸, 신촌, 말바탱이, 상리반, 도촌, 신포장, 하개, 강개의 11개 자연 마을이 있다.

원신리(元新里)는 옛 면천군 합남면 신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이전의 '원 신리' 지역을 말한다. 현재의 신리는 여러 부락이 합쳐져서 이룩된 마을이다. 원부락이라고도 부른다. 원신리에 서뜸, 동뜸, 윗뜸의 소부락이 있다. 신리는 원래 조선에서 가장 큰 천주교 교우촌이었으나, 1868년 오페르트의 덕산 남원군 묘 도굴 사건으로, 배가 지나간 삽교천 변의 신리 교우촌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피난하여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마을로 변해 버렸다. 서뜸은 원신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뜸은 원신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주교 공소가 이곳에 있었으며, '순교 복자 기념비(殉敎福者紀念碑)'가 있다. 천주교 신리 공소가 있어 우강면 솔뫼 김대건 신부 탄생지와 함께 천주교인들의 성지 순례지가 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인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가 있다.

 

신리성지
신리성지

 

신리성지 : 신리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지중 하나로, 당시, 천주교가 조선 구석구석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신부와 신자들이 순교한 유적지다. 다블뤼 주교의 은거처, 성인들의 경당, 순교자기념관과 순교미술관 등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공간이 신리성지와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시기, 신리 마을은 가장 먼저 그 교리를 받아들였던 지역으로 이후 신리 마을은 조선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지역으로 알려지게 됐다.

전망대로 올라가면 너른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찍으러 자주 방문한다는 지인의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전망대에는 여느 곳에서 볼 수 없는 십자가가 서 있고 400개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십자가는 신리마을의 성자 400명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편, 양곡 창고에서 카페로 변신한 치타누오바(Citta Nuova)’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는데 순례길 곳곳에 쉬어 갈 수 있는 카페 또는 쉼터가 많으면 좋겠다.

 

합덕성당-2km-합덕제중수비-1.7km-원시장, 원시보우물-1.7km-무명순교자의 묘-1.8km-신리성지로 가는 순례길을 걷기에는 많이 불편하다. 순례길 안내 표지판이 너무 적고, 생각에 잠겨 걷다가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가는 길이 좁은 도로이거나 농로가 대부분이었고 산책하기 좋은 길은 일부 구간이었다. 좀 더 많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한국의 산티아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다.

 

 

김선영 기자 earth28@naver.com

 

이 취재는 2023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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