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참혹한 충청도의 첫 순교터 홍주성지를 가다

순교자들과 복자 4위, 하느님의 종 3위
순교자들과 복자 4위, 하느님의 종 3위

홍주 성지의 특징

 

1. 전국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은 성지

홍주성지는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원시장 베드로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순교의 신앙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교회 순교록에 의하면,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 때(병인박해) 1866(고종 3)51, 1867년에 19명 등 모두 115명이 이 지역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관변 측 기록에는 102(중복 기록자 17)의 이름이 남아있는 등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만 212명에 이른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까지 포함한다면 1,000여 명이 넘게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충청도의 첫 순교터

천주님을 알고, 수년 동안 예비신자의 신분으로 옥에 갇혀, 옥중세례를 받고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는 1792년 추운겨울 얼고 있는 몸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이곳은 충청도의 첫 순교터가 되었다.

홍성 홍주읍성 감옥터
홍성 홍주읍성 감옥터

3. 6곳의 순교터

홍주 목사의 동헌, 교수형터(감옥), 홍주진영, 저잣거리, 참수 터, 생매장 터 등 총 6곳을 도보로 순례 할 수 있는 성지로서 심문과 고문, 죽음의 형장까지 순교자들의 신앙의 정신을 깊이 묵상하며 걸을 수 있는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생매장터인 홍성천변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생매장터인 홍성천변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4. 예비신자들의 모범성지

천주님을 알고 수년 동안 예비신자의 신분들을 입교시키며 자신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옥중 세례를 받고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면서도 순교 직전 자기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 이들이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차 순례가 가능한 성지

홍성역에서 홍주성지까지는 도보로 30분 거리로 많은 인원이 열차로 순례 할 수 있는 성지이고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기도와 묵상으로 순교 선열들의 은총을 체험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기차 순례지이다.

 

조양문(東門)바로 앞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가 집행되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순교 터이다.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으로 박해 당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다.
조양문(東門)바로 앞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가 집행되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순교 터이다.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으로 박해 당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다.

홍주 6곳 순교터

 

1. 순교 1<증거 터 목사 동헌>

동헌은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은 내포 지역을 관장했던 홍주목사가 머물던 곳이다. 홍주관할의 순교자들이 잡혀와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던 장소로써 갖은 고문과 배교를 강요당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 형을 받고 옥에 갇혔다.

2. 순교 2<순교 터 홍주옥>

천주교 4대 박해 중의 첫 순교 터로 113명의 순교자가 교수형을 받은 곳이다.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는 이곳에서 1,000여 대의 매를 맞고 동사로 순교하였다. 굶주림과 목마름, 교수형, 장살형, 질병 등으로 죽어간 곳이기도 하다.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홍주 관아에 자수하여 잠시 갇혀있던 곳이며, 또한 성 다블뤼 주교와 성 오베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주 루카가 처형되기 전에 갇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3. 순교 3<증거 터 홍주 진영>

홍주읍성을 지키던 무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까지 다스렸던 진영장이 머물던 곳으로, 4대문 중 가장 중심인 조양문(東門) 바로 앞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가 집행되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순교 터이다.

4. 순교 4<증거 터 저잣거리>

저잣거리는 장이 서던 곳으로 지금의 시장을 말하며,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이유로 조리돌림을 했던 곳이다. 순교자들은 관아로 끌려갈 때나 처형되기 전에 이곳에서 조리돌림, 침 뱉음, 돌팔매질 등 조롱을 당했다.

5. 순교 5<순교 터/참수 터>

신유박해(1801) 때 황일광(시몬)과 병인박해(1866)때 유(마르타)가 참수형을 받은 자리다.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곳으로 북문교 건너(오른쪽 방향) 월계천변에 있다.

6. 순교 6<순교 터/생매장 터>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 너무 많은 내포의 천주교인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신자들을 생매장한 곳이다. 이곳은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가장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서 교우, 신자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이곳에 버렸던 장소다.

 

홍주성지의 대표 순교자 복자 4

 

1. 원시장 베드로(1732~1792)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장이 홍주 옥터에서 순교한다. 신해박해(1790) 때 옥중 세례를 받고 1,000대의 매를 맞고 죽지 않자, 1월 엄동설한에 온몸에 물을 끼얹어 얼음덩어리가 되어 숨을 거둘 때에 저를 위하여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봉헌합니다라며 순교했다.

2. 방 프란치스코(?~1799)

감사의 비장(脾臟)까지 지내며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정을 보여줬던 방 프란치스코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를 받고 슬퍼하는 동료에게,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사또가 마지막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섭리의 은총인데, 어째서 슬퍼만 하오. 만일 우리가 천당 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리오하며 함께 옥고를 치른 후 순교했다.

3. 박취득 라우렌시오(1769~1799)

박취득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심문 중에도 인생은 나그네길이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천주교를 전했다. 곤장을 14백 대나 맞고 8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으니, 그는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으니 목을 매면 죽을 거요라며 새끼로 목을 졸려 순교했다.

4. 황일광 시몬(1757~1802)

홍주의 천한 백정으로 태어나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다가 천주교 신자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45세의 나이에 한양에서 잡힌 후 홍주로 이송되었는데, 백정인 나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말하고 참수 터에서 순교했다.

하느님의 종 3: 김선양(요셉), 최마리아, 박안드레아

 

천주교 박해는 역사 속 현실이었다.

 

1. 1791(정조 15) 신해박해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동생 권상연은 진산에 살던 양반 윤지충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신주를 불태우고 가톨릭식 장례를 지냈다(진산 사건). 당시 조선시대에 신주를 태운다는 것은 불효, 즉 삼강오륜 중 부위자강(父爲子綱)을 어기는 역모죄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강상죄(綱常罪)를 저지른다는 뜻이었기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처형되고, 이들에게 천주교를 포교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유배당한다.

2. 1801(순조 원년, 수렴청정기) 신유박해 : 공식적으로나마 교화주의를 내세우던 조선이, 지속적인 천주교 탄압 여론과 반대파 숙청이란 정치적 목적까지 얽혀 아예 대외적으로도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 사건이다.

1757(영조 33) 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5세의 나이로 계비가 된 정순왕후는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약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세력을 잡은 뒤 자신의 아버지가 속해 있었던 벽파(辟派) 세력과 손잡고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가엽게 여기는 시파(時派)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일가와 혜경궁 홍씨[정조의 생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등도 처형당했다. 또한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정약용(丁若鏞) 등 수많은 남인(南人) 학자와 관료들을 귀양 보내거나 사사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알렉시오가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 외세의 군대를 끌어들여 정부를 뒤집으려는 역적 행위를 하려다 발각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외세를 끌어들이는 반역자들'이란 인식이 박히고 말아 박해가 계속되었다.

3. 1846(헌종 12) 병오박해 :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이 외연도에 군함 3척을 끌고 오면서 기해박해 때 죽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며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은 더욱더 통상 수교 거부와 천주교 박해에 열을 올려야겠다고 판단해서 김대건 신부의 처형일자를 앞당긴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대건 신부에게 배교를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4. 1866(고종 3) 병인박해 :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박해이지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24명의 순교자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이 박해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다.

 

홍주성지를 돌아보며

 

해미국제성지를 시작으로 거꾸로 가는 순례길을 생각한 이유는 각각 흩어져 있는 순례길을 하나로 이어 보려는 시도에서였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응로 화백 생가기념관, 홍성 내 역사박물관과 홍주의사총 등을 들르면서 역사 문화탐방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로로 연결되지 않은 길을 마주칠 때마다 저쪽을 돌아 내포로 넘어가면 길이 이어지지 않을까?”라며 미련을 못 버리고 윤봉길기념관에서 홍주성지까지 어떻게 하면 걸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예산, 내포, 홍성, 당진과 아산으로 분주하게 다녔지만 결국 불가능했다.

우선, 안전한 보행길이 확보가 안 되고 중간중간 이정표가 있다고 해도 차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들이 있다. 게다가 어디서 쉴 것인지, 화장실 등 휴게시설이 있는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을 세운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대안은 있어 보인다.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티고개를 넘어 옹기박물관으로 이동 후에 윤봉길기념관까지 걸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홍주성지까지 일정 수의 방문객 신청 시 예약제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면 현재 홍성역에서 홍주성지까지 안내하는 것처럼 해미국제성지에서 홍주성지까지 이어진 순례길이 가능해보인다. 같은 방식으로 이어서 당진에 있는 솔뫼성지, 합덕성지와 신리성지를 방문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직은 주변 상권이 많은 방문객을 맞이할 만큼 발달되어 있지는 않고 쉬어 갈 수 있는 숙박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현실적으로 먼 얘기처럼 보인다.

거꾸로 걸어서 가는 순례길을 해미국제성지로부터 시작하여 근처에 있는 성지들을 하나로 이어 보려는 시도에 대해 너무 포괄적으로 순례길을 정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홍주성지 성당 오 신부님의 조언을 따라 이미 정해진 순례길 내에서 부분적으로 취재를 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홍주성지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방문객이 적었지만 2014년에 천주교 대전교구가 홍주성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하는 곳이라고 판단해서 전담신부님이 오시게 됐고 이후에 평화방송과 홍보자료 등으로 홍주성지를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또한 홍성군 담당자에 의하면 홍성군은 해마다 증가하는 순례객을 맞이하기 위해 홍성역부터 순교터까지 차량을 운행하는 등 편의를 제공하고 있고 로컬푸드 매장과 전통찻집을 저렴한 가격으로 운영하고 있다현재 철도 증설과 홍성읍성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홍주성지를 외부에 알리는 목적만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방문자들을 위해서는 좋은 여건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담당자의 설명을 듣는 동안 더욱 향상되는 교통 인프라와 홍성읍성 복원사업으로 말미암아 활기 넘치는 홍성군의 미래모습이 그려졌다.

홍주성지 성당을 관리하시는 분에 의하면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으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많은 분들이 홍주성지를 많이 찾고 있지만 미사를 볼만한 장소가 협소하다 보니 궂은 날에도 불구하고 성지를 방문한 신자들이 야외에서 미사를 봐야 하고 다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홍주성지 성당
홍주성지 성당

현재 홍주 순교성지 성당은 감옥터 앞의 상가 건물을 일부 임대해 사용 중이며, 20평 남짓한 임대성당이 들어선 건물마저도 철거를 앞두고 있어 순례자를 위한 성당 건립에 관심과 후원이 필요해 보인다.

 

김선영 기자 earth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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