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⑦

며칠 전에 우리 동네가 들썩였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전국노래자랑의 예선과 본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끔 부모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을 때면, 송해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이 나오는 전국노래자랑이 켜져 있곤 했습니다. 화면 속에 빠져들어 미소 짓는 부모님을 보며 언젠가는 출연을 하여 기쁨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룰 꿈의 하나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유전적으로도 저는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모임을 해도 저녁식사 후엔 자연스레 함께 노래방을 갔고, 특히 아버지가 마이크를 잡으면 몇 곡을 연속으로 부르시는 모습을 보며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라디오의 음악채널부터 찾는 걸 보면, 제 삶에 노래는 이미 일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 서양 사람들은 노래에 대해 어떤 격언을 남겼을까요?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다’(Qui cantat, bis orat)는 속담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이는 기도하는 동안 노래하는 것이 예식의 아름다움을 더할 뿐 아니라, 기도의 영적 의미를 더 깊게 하여 두 배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죠. 지금과는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성가를 부르면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께 온전히 집중되어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그의 체험에서 나온 얘깁니다.

이렇게 진심 어린 열정으로 임할 때 인간 활동의 심오한 잠재력을 일깨워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이란 정의입니다. 한때 인류는 자신을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라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래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파베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구를 사용하는 다른 동물이 밝혀지면서 이 말도 부적절해졌습니다. 이 즈음 인간이 만든 문명은 놀이라는 속성을 통해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1938)를 발표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에서부터 인간에겐 놀이가 전투이고, 전투가 놀이였던 것처럼 예술, 철학, 종교가 모두 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죠. 플라톤의 말처럼 인간이 신들의 놀이를 놀아 주는 노리개라는 것은, 인간은 놀이를 하면서 감각을 조절하고 원칙을 지키면서 어떤 질서를 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위징아의 결론입니다. 인간 안에 분명 유희본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놀이의 정신이 근대문명이 발전하면서 소멸했음을 그는 매우 안타까워합니다. 특히 20세기에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때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집단행위를 한다고 묘사하며, 겉으론 놀이가 많아진 것 같지만 놀이의 정신과 게임의 규칙도 내팽개친 천박한 시대라고 합니다.

건전한 놀이를 잃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놀라운 통찰력으로 읽어간 것이죠. 특히 정치에서 놀이 정신이 죽고 유치한 행위가 판친다는 그의 진단은 지금도 유효하게 보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다놀이하는 인간은 노래, 놀이, 게임, 스포츠, 예술 등의 유희적인 인간 활동이 사회를 형성하고 창의력을 키우며 소속감을 키워준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알려줍니다. 또한 열정으로 이런 문화 활동에 임할 때 절대자와도 만나는 거룩한 예식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유쾌한 놀이를 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인간으로 평범해 보이는 삶에서도 심오한 아름다움과 영성을 발견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무더위와 장마가 힘들게 하는 이런 시기에 우리 함께 찌푸리지 말고 즐겁게 이겨나가 봅시다. 잘 놀아봅시다!

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
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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