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역사를 되살리며-②

해미읍성 진남문 옆에 서 있는 소원 은행나무
해미읍성 진남문 옆에 서 있는 소원 은행나무

해미읍성 진남문(정문) 옆에는 수령이 150~2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지가 열 한 개나 뻗어있다. 게다가 하트 모양이다. 심지어 두 갈래로 뻗은 나무밑동은 서로를 감싸 안고 있는 형상이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신기한 일이다.

사실 성벽 중간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본다. 달리 보자면 조선 말기 관리가 소홀한 면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의문을 풀기 위해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설화 하나를 발견했다. 그 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옛날에 길순이란 처녀와 석돌이란 총각이 서산 해미에 살고 있었다. 석돌이네 집은 현재 오학리 현재 왕국회관 근처에 살았고, 길순이네 집은 현재 읍내리 지금의 해미파출소 부근에 살았다.

당시 해미는 해안방어 중심기지로 서산보다 고을의 규모가 컸다. 그래서 해미읍성 앞에 사는 사람들을 읍내 사람들이라 하여 변두리 주민보다 양반과 부자가 훨씬 많이 살았다. 석돌이와 길순이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연애 장소는 팽나무 주변과 신후대숲 근처였다고 한다.

그들은 혼인하기로 약조하면서 혼인을 하면 자식 열 명을 낳고 행복하게 백년해로하자라며 진남문 옆 그 장소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사실 석돌이네 집안은 먹고 살 만큼 넉넉한 대가족 집안이었다. 석돌이가 혼기가 다가오자 동네일을 도맡아볼 정도로 마을의 유지였던 할아버지는 참한 규수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길순네 집은 가난하여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밭일을 가는 도중 길에서 딸을 낳아 이름을 길순이라 지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길순이는 어려서부터 일락천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옆에 있는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오기도 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왔다. 고된 일을 하는데도 잘 먹지 못한 길순이는 늘 병약했다. 그러니 석돌이 부모는 길순이와의 혼사를 반대했다.

하루는 석돌이에게 읍내에 사는 이장댁 규수와 혼사 얘기가 오갔다. 이 소문은 길순이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녀는 결국 이별을 생각하며 그날부터 석돌이를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돌이는 날마다 은행나무 옆에서 길순이를 기다렸다.

어느날 해미 서당의 훈장이 친구 고을 수령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를 맞고 하염없이 서 있는 석돌이를 발견하게 됐다. 훈장은 놀라기도 하고 측은한 생각도 들어 읍내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반양천 건넛마을에 사는 석돌이라는 총각이 길순이란 처자를 잊지 못하여 매일 은행나무 옆에서 처자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훈장은 석돌이네 할아버지를 찾아가 이 사실을 말하고 설득했다. 이미 온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는 걸 안 할아버지는 마음을 돌려 석돌이와 길순이를 불러 위로했다.

그리고 훈장의 주선으로 양가 부모님이 상견례를 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마을에서는 석돌이와 길순이의 혼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7남매를 낳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길순이가 어느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석돌이는 아내 길순이가 그리울 때마다 해미읍성 안 은행나무를 보며 길순이를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석돌이가 집안일로 어려울 때마다 길순이를 생각하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뜻하는 일들이 술술 잘 풀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석돌이도 사랑하는 아내 길순이 곁으로 같다. 이제는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심어놓았던 은행나무만이 홀로 남아 세월을 맞고 서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긴 세월 동안 잊혀 갔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대산읍지 편찬위원인 홍성고등학교 출신 이상은 씨와 서산중학교 출신 김윤환 씨 증언을 윤병도 70(오도민협회 회장)님으로 부터 전해 들었다.

임종국 해미읍성 수문장
임종국 해미읍성 수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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