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의 ‘내사랑 벨리댄스’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우리네 인생을 가을에 비유한다면 몇 살부터가 가을일까. 최근에는 의술의 발달과 함께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어쩌면 예순부터 그 후 20년을 가을이라고 비유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인생의 봄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서산에서 라인벨리댄스LBA 협회를 운영하며 LBA알라공연단 단장을 맡고 있는 신미경 대표가 바로 주인공이다.

그녀는 10여 년 전부터 살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벨리댄스를 배웠고, 나아가 코로나 때 취미로 드럼까지 섭렵했다는 그녀는 너무 바빠서 요즘은 나이들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미즈실버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댄싱퀸 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녀의 스케줄에는 올 한해도 틈 없는 시간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Q 에너지가 소진될 만도 한 대 대단하십니다. 먼저 올해 계획부터 들어봐도 될까요?

올해부터는 공연단과 함께 한국적인 역사와 문화가 담긴 K벨리댄스를 가지고 해외공연 겸 연수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보다 먼저는 오는 6월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벨리댄스를 무대에 올려요. 요즘 한창 공연 준비로 분주한 시간을 보낸답니다.

많은 분들이 건강도 찾으면서 문화도 함께 만들어가는 그런 벨리댄스를 만들어 확신시키고 싶은 게 제 욕심이에요. 이제는 많이 대중화됐다고는 보지만 그래도 다른 분야에 비해서는 한참 멀었잖아요. 서산지역을 중심으로 국내 벨리댄스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어요. 이것만 성공하면 국제 벨리댄스 페스티벌도 계획하고 있구요.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림없잖아요. 현재 대학원 석사과정 교수님들과 함께 머리를 모으고 있답니다. 나아가 벨리댄스 뮤지컬도 만들고 싶어요. 다양한 문화예술인과 악기로 협업하려 합니다.

신미경 대표의 벨리댄스 공연
신미경 대표의 벨리댄스 공연

Q 라인벨리댄스협회LBA 대표면서 현재 문화예술경영 MICE석사 과정에 있는데 늦은 공부를 하면서 힘들지는 않으세요?

왜요. 나이도 있고, 아직 초등학생 늦둥이 아이가 있어 어렵죠.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투자하지 않고선 그 어떤 성공도 이룰 수 없잖아요. 저도 그런 차원이에요.

현재 저는 벨리댄스의 외연확장을 위해 대학원에서 문화예술경영 MICE’ 등 공연기획 공부를 하고 있답니다. (벨리댄스)우리 공연은 8분에서 10분 정도로 세 곡 정도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잖아요. 늘 고민이었죠 그것이.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학업의 필요성을 감지했다고나 할까요.

지난 3월에는 라인벨리댄스 LBA알라공연단 간판도 내걸었답니다. 우리 지역의 특성을 살려 보다 폭넓고 다양한 문화예술로 같이 & 가치라는 이름 아래 최선을 다하려고요. 벨리댄스 하면 서산이 떠올려질 때까지요.

‘미즈실버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댄싱퀸 상’을 수상한 신미경 대표
‘미즈실버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댄싱퀸 상’을 수상한 신미경 대표

Q 꿈이 대단하십니다. 혹시 고향이 서산인지요.

아녜요. 제 고향은 전북 군산이에요. 우리 집은 일하시는 분들을 두고 농사를 지을 만큼 대농이었죠. 저는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5~6학년 때는 영어와 수학을 과외받았어요. 저희 부모님의 공부 욕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죠. 그리고 늘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어요.

시골에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어요. 몸이 약해서 매일 멀미를 했죠. 학교만 가면 엎드려 있는 게 일과였답닏아. 그냥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도 부모님은 딸이라고 자취를 안 시켜주는 거예요.

어느날 선생님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렸더니 그길로 우리 아버지께 매일 (학교)와서 엎드려 있느니 차라리 학교 가까운 곳에 훌륭한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 어떠냐그런 자리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설득해 주셨죠.

그러면서 저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약국집에서 초등학생 둘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건설회사에 근무했고요.

회원들과 입상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
회원들과 입상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

Q 당시에는 고등학생도 입주 가정교사를 했나 봐요? 건설회사에 다녔다고 하셨는데 그때 얘기도 들려주세요.

그럼요. 지금이야 고등학생들이 야간자습이다 뭐다해서 어디 가르칠 시간이나 있나요. 그때는 그래도 교사들이 학생들을 주선해 주던 시기였어요. 선생님의 배려로 어려웠던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몸이 힘들지 않아 살 거 같더라고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고모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고모부가 운영하는 건설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주일에는 모태신앙인 관계로 교회에 다녔고요. 또 짬을 내어 컴퓨터를 배우기도 했답니다. 뭔가를 배우면 뿌리를 뽑는 경향이 있나 봐요 제가(웃음).

그 당시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들이 드문 시절이었어요. 학원에 다니면 다닐수록 건설회사보다 컴퓨터 쪽 일이 제 적성에 맞는다는 걸 깨달았죠. 고모부께 잘 말씀드리고 이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인터넷 정보제공서비스 회사였어요.

프로그램 개발도 하고 웹디자인, 홈페이지 제작과 운영 등의 일을 했어요. 당시만 해도 묻지마 투자가 있을 정도로 인터넷 관련 업계가 호황이었죠. 저는 경리에서 나중에는 전화 영업까지 확장했어요.

경제지 등에 신문광고가 나가면 기업체들이 전화가 오고, 그럼 저는 일일이 응대하며 영업을 해나가는 일이었어요. 정말 대단했죠. 나중에는 회사 매출을 저 혼자 책임질 정도로 영업이 대박 난 거예요. 그때는 정말 그 일이 천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퇴사를 하게 됐는데 그때 대표님께서 나가시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차라리 하던 일을 가지고 나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본의 아니게 제 사업을 하게 된 계기였었죠. 그때는 기업체마다 전산실이 거의 없는 상태였어요. 그러다 보니 그 일들을 대부분 우리 회사에 대신 맡긴 시절이었죠.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Q 서울에서 승승장구하던 분이 어떻게 서산으로 내려오게 됐으며 밸리댄스를 추게 된 계기는요.

남편이 일 때문에 서산으로 오게 됐어요. 저희는 주말부부로 지냈죠. 그런데 어느 날 서산이 너무 좋다며 남편이 저를 꼬드기는 거예요(웃음). 하던 일을 대부분 정리하고 2010년 남편 따라 서산으로 내려오게 됐죠. 그때는 저 혼자 사업을 하고 있던 터라 쉬고 싶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20109월 초, 서해안을 타고 올라온 태풍 곤파스가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와 지곡면 두 곳에 있던 신랑 회사를 다 날려버리는 참변을 겪었답니다. 아득했죠. 이사 온 지 딱 3개월 만이었어요. 정리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재기하기 위해 남편은 해외로 나갔어요.

그 무렵이었죠. 연고지가 없다보니 아는 사람도 없고, 그냥 혼자라 약간의 갱년기증상이 오면서 골다공증에 우울증까지 오더라구요. 늦둥이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문화센터 문을 노크했습니다. 저조차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

신혼여행 때 남편이 제가 추는 춤을 보고 어디 가서 춤추지 말라고 할 정도로 몸치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센터에서 제가 어떤 강좌에 등록한 지 아세요? 바로 벨리댄스랍니다. 아주 운명적인 만남이었죠.

근육을 잡고 움직이는 거라서 라인도 예뻐진다는 말에 혹 한 거죠(웃음). 음악 속에 묻혀서 현실을 잊어버리기에도 그만한 게 없었고요. 그때는 마음먹고 시작한 거죠. 그 덕에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무엇보다 젊음을 되찾았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보니 행복은 덤으로 찾아왔고요.

‘미즈실버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댄싱퀸 상’을 수상한 후 트로피를 들고 있는 신미경 대표
‘미즈실버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댄싱퀸 상’을 수상한 후 트로피를 들고 있는 신미경 대표

Q 부상에도 투혼을 발휘하여 입문 3개월 만에 대회에서 입상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벨리댄스 시작한 지 3개월 됐을까요. 갑자기 선생님께서 무슨 대회가 있다면서 누구 나가실 분 계신가요?”라기에 용기 내서 제가 초보자인데 가능하냐고 물었죠. 글쎄 괜찮대요. 그때부터 출전 전까지 선생님이 트레이닝을 엄청나게 시켜주더라고요.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그런 와중에 대회를 며칠 앞두고 그만 산책하다가 발목을 접질려버린 거예요. 큰일 난 거죠. 병원에서는 절대 운동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습니다. 고민하다가 대회만 나가고 끝나면 쉬면서 치료해야겠다맘먹었죠.

몰래 안 보이게 밴드로 발목을 묶고 출전했어요. 꼰지발을 많이 사용해야 해서 통증이 와도 꾹꾹 눌러 참았죠.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어요. 나가서 장려상을 받았지 뭐예요. 이보다 더 획기적일 수는 없잖아요.

대회 끝나고 한방치료를 하면서 다시 3개월 후에 대회출전을 했어요. 그렇게 계속 (발목)관리하면서 출전, 또 출전하면서 관리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발목 묶은 게 자그마치 3년을 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 나았겠거니 생각하고 꺼꾸리에 발목을 넣고 매달렸는데 그만 또 (발목)빠져버린 거예요.

다시 2년을 묶어야 했던 시절, 고질병이 될까 봐 정말 겁이 났었는데 다행히도 잘 관리해서 이제는 건강하답니다. 그래도 방심은 절대 금물이에요(웃음).

코로나19 시기 드럼을 배운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코로나19 시기 드럼을 배운 라인벨리댄스협회LBA 신미경 대표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제 인생에서 정말 감사한 분들이 있어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뭐니 뭐니 해도 가족의 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수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요. 어느날 아들이 엄마는 대상도 받고 맨날 1등하고 그러는데 선생님은 왜 안 해? 나는 엄마가 선생님을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자녀 둘을 키우면서도 절대 안돼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도 마찬가지였죠. “나이 먹어서 안 돼!” 이렇게는 못 하잖아요. “그래, 그럼 한 번 해볼까라고 말하면서 바로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죠.

사실 마음 저변에는 저로 인해 비슷한 연령대에 있는 주부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어요. 그도 그럴 것이 갱년기가 왔을 때 저도 밸리댄스로 다 극복했잖아요. 몸매 관리도 하고요. 대 근육은 쓰지 않고 소 근육들을 쓰니 여자들한테는 최고의 운동이 바로 벨리댄스더라구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알기에 1년 동안 재능기부를 했었어요. 물론 현재는 강사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요. 우리 아들이 아니면 꿈도 못 꾼 일이잖아요.

남편에게도 감사해요. 코로나19로 인해 정말 힘들었을 때 정리해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어요. 그때 그냥 사람이 없어도 내 운동한다고 생각하고 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또 하나 있어요. 이건 좀 그런가요? 저는 제 몸을 비춰주는 거울에게도 감사해요. 제게는 벨리댄스가 사실 선물 같은 존재예요. 주말만 빼고 거의 거울 앞에서 종일 연습하면서 살았거든요. 오죽하면 집에서도 음악을 틀면 바로 춤을 출 수 있도록 벨리복을 입고 있었구요. 나이가 들어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분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그 덕에 많은 대회에 출전하게 됐고 최고상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프로공연단에 들어가서 공연도 하고, 또 봉사활동도 하면서 지냈죠. 그래도 여전히 벨리댄스로 인해 거울과는 멀어져 본 적이 없는 분신 같은 존재예요. 제 아름다운 바디라인을 항상 지켜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벨리댄스의 매력에 한번 빠져보시겠어요? 여성들의 영원한 워너비 벨리댄스는 곡선미는 물론 유연성을 키워주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답니다.


벨리댄스 예찬론자 신미경 대표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항상 자신을 가꿔나가면서 거꾸로 가는 인생을 사시기 바란다구구팔팔이란 말도 있다.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자는 뜻인데 함께 벨리댄스를 하면서 행복한 청춘을 사시길 기원한다고 했다.

여리지만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강인한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벨리댄스를 추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신미경 대표
벨리댄스를 추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신미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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