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두웅 서산시대 전 편집국장
박두웅 서산시대 전 편집국장

우리는 공정을 말합니다.

공정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로 공의(righteousness)’정의(justice)’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정의 개념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323)라고 합니다. 그는 배분적 정의의 공정성(fairness)을 구현하면, 평화로운 공동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배분적 정의란 사회적으로 이미 규정된 차이, 곧 출생 성분, 소유 재산, 개인의 역량과 관련한 차이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정당화된 그 시대상을 반영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우는 공정이란 질서유지입니다. ‘status quo’, 현상유지이지요. 이런 공정은 안정성을 유지시켜 주는 규범과 제재를 낳습니다. 따라서 공정은 응보적 정의, 곧 사회 안전과 통합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체계를 뜻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가 말하는 공정이라는 화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입니다.

그렇다면 서양세계의 정신적 사상을 지배해 온 성경에서의 공정은 어떨까요. 성경은 배분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에 관심합니다. 다시 말해, 공정한 배분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긍휼과 권리의 회복이 정의라는 것이지요.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서들은 공의와 정의를 공평한 배분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회복적 정의공의개념으로 포함 시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정의와 공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른바 포도원 주인과 날품팔이들의 비유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종일 일한 품꾼들과 저녁 늦게 와서 겨우 한 시간 동안 일한 품꾼들에게 똑같이 하루의 품삯, 한 데나리온을 지급한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 이야기이지요.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은 은근히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자, 주인에게 항의합니다.

포도원 이야기는 코로나19로 시행된 긴급재난지원비를 둘러싼 논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국민 모두에게 지급해야 한다, 아니다,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다툼이지요. 일부는 왜 일하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느냐, 국민 모두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흥분하면서, ‘빨갱이 정부, 종북 좌파정부라 그런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노동 강도와 노동력을 고려하지 않고 꼭 같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주장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오늘의 한국을 보았다면 무엇이라 답했을까 궁금합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본다면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불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입니다.

대한민국의 불평등 수준은 어떤 수준일까요. 오랫동안 경제적 불평등의 대명사였던 멕시코와 미국을 추월한 지 오래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불평등과 차별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습니다. 학벌, 성별에 따른 불평등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만을 강조합니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도 정치인들은 공정을 외쳤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한민국 공정의 이념이 실현된다면, 한국 사회는 불공정한 불평등사회에서 공정한 불평등사회로 진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불평등사회는 외면하고 공정만을 외치는 대한민국 공정은 엄격한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기득권자의 논리가 아닐까요. 불평등과 차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외쳐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배분적 정의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회복적 정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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