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나의 ‘하! 나두’ 건축 54

하수처리시설 하부. 낮고 어두운 곳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수처리시설 하부. 낮고 어두운 곳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공허하게 비워진 트레이싱 페이퍼에 가로로 긴 선을 그어본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나만의 스타트 라인은 단단한 습관이 되었다. 현존하는 지표면을 그림 속에 옮기고 나면 어쩐지 신이 난다. 위로 아래로, 때로는 강하고 잠시 부드럽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을 이어 나간다. 그렇게 상상 에너지가 세포처럼 분열을 일으키며 무언가로 탄생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오늘따라 어쩐 일인지 조금 아래로 더욱 아래로 깊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발밑. 평소 보이지 않는 흐름과 힘이 있다. 음습하고 어두우면서도 기능적이고 안정적인 지하. 이동 수단. 각종 관로. 천연의 광물과 수로. 그리고 사자의 영역까지. 연결과 단절의 완급 조절을 통해 이루어진 'Another level'. 별달리 생각해 보지 않는 영역일지언정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지상과 지하가 복잡하고도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다층적으로 상호작용하고 변모하며 생동한다.

현대의 중요한 일부가 된 지하의 삶과 모습에서 도시의 바탕이 되어준 우리 삶의 발자취를 되짚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도시의 스펙트럼을 더 넓게 펼쳐간다. 특정 구역의 지하 세계를 읽고 나면 그 장소와 더욱 친해진 기분이 든다. 과거와 추억을 알려주고 속내를 드러낸 사이가 된 것 같다. 입체적인 도시 읽기는 자신만의 도시 이야기를 보태며 서사를 지어낸다.

스스로를 브랜드로 만들어 자기 PR을 해야 한다고도 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도 한다. 둘 다 십분 이해가 가는 주장이다. 그런데 솟아오른 마천루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전망보다 땅이 품은 방공호의 안정감에서 더 섬세한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힘을 주는 G.L 아래의 능력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뒤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여야만 한다.

최하나 건축 칼럼니스트/전) ㈜엄앤드이종합건축사사무소/전) 서울건축사협회 서부공영감리단/전) 2021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시민위원
최하나 건축 칼럼니스트/전) ㈜엄앤드이종합건축사사무소/전) 서울건축사협회 서부공영감리단/전) 2021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시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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