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 나라사랑기념탑에 기록된 독립운동가 명단 재정비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서산은 오지라 불릴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육로보다는 바닷길을 통해 인천항을 통해 서울을 다녔던 곳. 그런 서산지역에서 나라를 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은 어떠했을까.

서산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시작됐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이후 재봉기한 창의대장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한 정주원 의병에 적지 않은 수의 서산 출신의병들이 참여했다.

이후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은 이철영, 김상정과 같이 직접 몸으로 항거하는 의협투쟁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3.1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단 서산지단원 서병철, 조선민족대동단 소속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음암면 유계리 출신의 김용환, 의친왕을 수행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향했던 한기동 등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국외 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전개됐다.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도 서산출신 학생들은 빠지지 않았다. 운산면 출신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생 시절 항일학생단체인 다혁당을 결성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지난 2021년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타지역과 비교에서 월등이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조사는 문헌조사와 일제강점기 당시의 형행기록조사, 관련 주민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진행됐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병 9, 계몽운동 278, 3.1운동 112, 국내항일 82, 독립운동 지원 1, 만주방면 2, 문화운동 11, 중국방면 1, 청년운동 42, 학생운동 3, 기타 1명이다. 이를 보면 이름 없는,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서산 주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난지도에서 최구현 의병과 함께 일본수비대에 항전했던 김태순 의병, 광주학생운동 연합시위 참여를 권유하고 경성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병묵 학생, 비밀결사단체 독서회, 적우회 등 적색일반사용인조합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선 17세의 민태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34년 신건설사건(2차 카프검거사건) 주동자로 활동했던 윤붕원 등 일부는 총을 들고, 일부는 대한독립청년단 활동으로, 계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과 군자금 모집으로, 또 학생은 학생운동으로, 그리고 일반 주민들은 3.1만세시위로 참여했다.

2021년 독립운동가 발굴용역 이전, 보훈처 공적조서 및 공훈록에 기록된 서산지역 독립운동가는 194명이다. 충청남도 출신 전체 독립유공자 1,567명 중 청양, 홍성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여기에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서산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는 3.1절을 맞아 다시 찾아 본 서산시 동문동에 위치한 서산시나라사랑공원. 2012117일에 준공되었고 2012517일 기념탑 준공식을 하였다. 서산시나라사랑기념탑은 공원이자 현충시설이다.

독립유공자 기념탑 옆으로 팔봉면 진장리 김용환 독립투사 선대 묘역에 박혀 있던 일제 혈침과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강요를 위해 일본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새긴 표지석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사랑기념탑을 중심으로 독립유공자와 6·25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 참전자를 추모하기 위한 3개의 보조탑이 서 있다. 독립유공자 기념탑에는 대산읍, 인지면, 부석면 등 읍면동 지역으로 분류된 독립유공자 이름이 새겨있다. 명단은 총 45, 기념탑 조성 당시 새긴 44명에 나중에 1명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유공자 이름을 살펴보니 국가보훈처 공적조서 및 공훈록에 기록된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194명 중 태안이나 당진지역으로 분류되는 유공자를 제외한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작성한 듯 싶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그도 아니다. 대호지면 출신 유공자중 일부는 새겨있고 일부는 빠져 있다. 또 이유가 있겠지만 일부는 본적이 타지역인데다, 독립운동도 서산지역이 아닌 곳에서 활동하셨던 분들도 기록되어 있다.

나라사랑기념탑중 독립유공자 명단이 운동 당시 행정구역인 서산군 출신으로 기록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현재 변경된 행정구역으로 기록하는 것이 옳은지 다소 혼란스럽지만 이 문제는 차지하고 타지역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에 대한 재정리와 최소 60여 명이 더 기록되어야 함에도 독립유공자 기념비에는 그 이름들이 없다. 수고스럽지만 일일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보명단과 대조해 보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우선 3.1운동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해미면의 명태억·유세근·유한종·이기신·이명학, 운산면의 오인탁, 음암면 이주영·채돈묵, 성연면의 김옥제·남명숙·성치근·정화성·조성습·조순봉·조재극·한명옥, 서산읍내의 임낙현, 타 지역 3.1운동을 했던 송기주·정판동 선생이 기념탑에 기록되지 않았다.

 

또 국내 항일운동 중 파리장서 운동의 김상무, 일제의 총독정치 반대투쟁의 송전준(태안 근흥 출신/다른 이름으로는 한 준이익교(부석정재학(경기도 옹진, 서산 성결교회 목사), 군자금지원의 김용환(음암최예근(서산), 학병 반대운동의 김형설(팔봉), 독립애국단의 문봉의(태안 안면추교철(부여군 외산), 청년애국단의 이시우(미상), 대동단의 한기동(경기도 인천), 신사회건설의 허경(고북), 광복군의 백준기(서산오정석(해미이종하(충북 진천), 의병의 이홍(서산 분동), 학생운동의 함수만(미상) 등도 빠져있다.

기념비에 새겨진 이름 중에 혼란스러운 부분도 정리가 필요할 듯 하다. 서산군 지역이었던 대호지면이 1957116일 정미면과 함께 당진군(현 당진시)에 편입되면서 이규순은 당진지역 독립운동가로도 기록되어 있다. 반면 고국한, 고병선, 고쇠능, 김을용, 남덕일, 이세화, 장익환, 전여심, 정상봉, 정재기 독립운동가는 서산지역 독립운동가로만 기록되어 있다. 대호지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대산읍 출신으로 대호지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문만동 독립운동가는 당진시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올라있다.

또 이세원 독립운동가는 독립유공자 정보에 학생운동으로 본적은 충청남도 예산으로 되어 있지만 대산읍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산읍 출신으로 새겨진 조종원은 충남 홍성군 출신으로 홍성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송전준(異名 한 준)은 태안 근흥면 출신으로 당시 부석면 소재 공립심상소학교에 교사로 재직중 학생들에게 일본왕을 비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아 부석면 출신 독립운동가로 새겨졌다.

지곡면 출신으로 새겨진 김금산, 송광운은 본적이 대호지면으로 대호지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성연면의 박성옥은 본적이 대호지면, 권주상은 본적이 아산 영인으로 대호지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음암면의 유동열은 본적이 평안북도 박천, 호억준은 대호지면 출생이다. 고북면의 최준모는 공훈 내용을 알 수 없고, 부춘동의 유인기, 김봉욱, 김성연, 송재만, 이대하는 대호지면 출신이고, 서정천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또 수석동의 이성하는 대호지면 출신이고, 석남동의 박한동은 본명이 박수봉으로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다.

이처럼 기록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아마도 서산시 나라사랑기념탑을 설립할 시 독립운동가에 대한 세밀한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행히 지난 2021년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미서훈 독립운동가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는 등 서산지역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정비가 이뤄졌다.

이참에 서산시나라사랑기념탑에 올라있는 명단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당시 서산군 차원에서의 명단과 함께 발굴 용역에서 밝혀진 미서훈 독립운동가 명단도 기록되기를 바란다.

올바른 역사의식은 주인과 노예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독립운동가들은 개인의 행복을 구걸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풍찬노숙·삼순구식하면서도 항일의 길을 걸었다.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새기는 최소한의 노력이 그분들의 노고에 만분의 1, 아닌 억만분의 1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박두웅 서산시대 전)편집국장
박두웅 서산시대 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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