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과 양열공 정인경(鄭仁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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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과 양열공 정인경(鄭仁卿)
  • 서산시대
  • 승인 2016.03.2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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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홍(자유기고가)

우리고장 서산의 지명 발생과정과 양열공 정인경과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마한 56개 속국 중 하나인 치리국국이 현 서산 지역에 위치하였다. 백제 때에는 기군(基郡)으로 불렸으나 통일 신라 때인 755년(경덕왕 14)에 부성군(富城郡)이 되었다. 부성군은 휘하에 2개의 영현을 두고 있었으니 그 영현은 지금의 지곡인 지육현과 지금의 태안인 성대혜현(省大兮縣)이다. 이후 지육현(知六縣)은 신라 경덕왕 때 지육현(地育縣)으로 개명되었다가 고려시대에 북곡현(北谷縣)으로 지명이 바뀌고 이후 폐현 되기에 이른다. 성대혜현(省大兮縣)은 신라 경덕왕 때 소태현(蘇泰縣)으로 바뀌어서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충렬왕때 환관 이대순이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자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승격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부성군은 고려 인종[1123~1146] 때에 현령을 두었으나 1182년(명종 12)에 현령을 잡아 가두고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호마저 제거 당하는 불운을 맡는다. 그런데 1284년(충렬왕 13)서산 출신인 정인경(鄭仁卿)이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을 습격, 많은 전과를 올린 것을 가상히 여겨 충렬왕이 서산군으로 복군시켰다. 이 때에 비로소 서산이란 지명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고장 서산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 성씨는 서산 정씨와 서령(서산) 류씨, 서산 송씨 등을 꼽을 수 있다. 양열공 정인경(鄭仁卿1237~1305)은 우리 고장 서산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서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기도 하다. 정인경은 서산 정씨의 시조 정신보(鄭臣保)의 아들로 고려시대 무신이며 원나라와 외교를 전담한 탁월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고려 후기 정인경의 부친 정신보가 중국 송나라에서 우리고장 서산의 간월도로 망명하여 정착하였고 정인경은 간월도에서 태어나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하여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고려 고종 말엽에 몽고군 침입 시 몽고군을 야음을 틈타 기습하여  큰 공을 세우고 관직에 나아가 제교(諸校)가 되었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치며 중앙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다 상을 당하여 고향 서산으로 되돌아온다. 상을 치른 후 다시 관직에 나가 1269년 충렬왕(忠烈王)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충렬왕을 호종하였고 이로 인하여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두터운 신임을 받기에 이른다. 이에 관직이 금오위정용장군(金吾衛精勇將軍)을 거처 군부판서춘궁익위판전(軍簿判書春宮翊衛判典)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왕으로부터 서산을 본관으로 하사 받고 서산 정씨가 된다. 이후 대장군으로 승진하여 만주 일원에 퍼져 있으면서 유랑하고 있는 고려 유민들을 본국으로 데려오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특히 외교관으로 원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여 빈틈 없는 업무처리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외교능력으로 고려와 원나라로부터 공로를 동시에 인정 받는다. 그는 수시로 양국을 오가며 탁월한 외교력으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이를 원만히 해결했다. 이러한 공로로 정인경은 충렬왕 14년 1288년에 세자원빈(世子元賓)이 되었으며 또한 원나라로부터도 공을 인정받아 공신(功臣)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종국에 그는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벼슬에까지 이르렀으며 1305년 병이 들어 12월 17일에 타계한다. 왕은 그의 타계를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시호를 추서하는데 그의 시호가 다름 아닌 양열(襄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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