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120

아이키우기 좋은 대한민국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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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나이가 많은 여성 선배들로부터 여러 번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우리 땐 애 낳기 전날까지 근무하고 몸조리 끝나면 바로 출근했는데 지금은 세월 참 좋아졌다는 말이다. 시대적 배경과 문화, 복지제도가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친하지도 않은 선배가 굳이 까마득히 어린 후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이야기는 나의 엄마나 가까운 지인에게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올해 81세인 엄마는 출산 직전까지 농사일을 했으며 밭을 메다 애를 낳으러 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건 엄마로서 본인의 역사를 딸에게 얘기해주는 것이기도, 같은 여성으로서 겪은 일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6남매를 출산한 엄마의 스토리는 놀라웠고 때로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선배들은? 나는 그들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바뀐 복지제도에 감사하는 마음보다 그들은 누리지 못한 것을 내가 누린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먼저 든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세대라는 사실에 눈치가 보인다.


-인사의 의미-

첫째 출산 후 50일쯤 되었을 때 여성 관리자에게 전화가 왔다. 요지는 그동안 병가도 쓰고 출산휴가도 썼으니 최고 관리자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하러 오라였다. 여성 관리자가 말하는 인사란 관례상 마주 대하거나 헤어질 때에 예를 표하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는 인사가 아니라 입은 은혜를 갚거나 치하할 일 따위에 대하여 예의를 차리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는 인사였다.

임신 후반기에 나는 출혈로 입원을 세 번쯤 하고, 야간 분만실에도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 나와 태아의 목숨에 위협을 느끼며 조심스런 시간을 보냈으며 분만 직후에는 아기가 신생아중환자실에 입원하는 바람에 산후조리원과 대학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병가는 정당한 사유가 있었으며, 오히려 산후휴가를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찍 쓸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그들은 은혜라도 베푼 듯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오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아기가 목을 가누지 못해 지금은 갈 수 없고 목을 가누는 100일쯤 가겠다고 대답하니 찬바람이 쌩한 말투로 그럼 직접 최고 관리자에게 전화해서 말하라고 했다. 남성인 최고 관리자는 내 말을 듣고 아이는 업고 와도 되고 안고 와도 되는데 핑계 대지 말라고 비아냥거렸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남성 관리자보다 그 아래의 여성 관리자에게 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힌남노와 가족돌봄휴가-

부서 회의 중에 역대급 태풍 힌남노와 관련된 주제가 나왔다. 육아시간을 쓰는 A심각한 피해가 예상되는 요일에 가족돌봄휴가를 써도 되냐고 질문했다. 자리에 있던 여성 관리자는 태풍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험한 상황이다. 누구는 출근을 하는데 누구는 휴가를 써서 출근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답변을 했다. 같은 궁금증을 안고 있던 나는 가족돌봄휴가를 쓰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질문을 삼켰다.

회의가 끝날 즈음 다시 A태풍으로 휴업을 하면 유치원생인 아이를 집에 혼자 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관리자는 휴가보다는 재택근무를 신청하는 게 좋겠다는 방향으로 마무리 지었다.

누구에게나 위험한 환경인 것은 맞지만 누구에게나 돌보아야 할 어린 자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출발선이 다른 마라토너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처럼, 그들의 상황은 같지 않다. 단언컨대 어린 자녀의 끼니와 간식을 차려주고 돌보는 것보다 회사에서 내 한 몸 챙기며 일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지나온 시간의 힘들고 어려운 기억은 점점 희미해진다. 시대와 배경에 따라 처지는 상이하지만 그 길을 지나가 본 사람은 마치 그 길의 전부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종종 여성들은 또 다른 여성의 적이 된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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