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118

치안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치안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치안이 좋은 나라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외국인들은 새벽까지 문을 여는 대한민국의 술집과 상점들, 늦은 시각에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거리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환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생각은 내 경험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3교대 근무를 하던 2007년에 겪은 일이다. 작은 빌라들이 많이 모여있는 OO동은 젊은 여성이 많이 사는 동네였고 간혹 여성을 겨냥한 범죄가 일어났다는 카더라형식의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나도 4층 빌라의 1층에 살고 있었다. 사무실이나 상가를 개조한 듯 중문 너머 유리로 된 현관문이 골목과 맞닿아 있는 그래서 전세금이 비교적 적은 집이었다.

그날은 오전 근무였다. 출근하기 위해 어스름이 옅어지는 시간에 현관문을 열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인적이 드문 주말 새벽이라 신경이 곤두섰다. 빠른 동작으로 문을 잠갔다.

아무렇지 않게 골목을 나가면서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예감이 이상했다. 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노래를 끄고 주위의 기척에 귀 기울였다. 곧장 걷지 않고 보이는 빌라 주차장마다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걷는 남자의 모습이 수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쁜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다. 다행히 도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로의 왼쪽은 버스정류장, 사람들 몇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의 오른쪽은 회사로 가는 방향, 조금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쭉 직진하면 회사다. 버스로는 두 정거장 거리. 어느 방향을 선택할지 내적갈등 끝에 오른쪽을 택했다. 버스정류장에 멈춰서면 남자가 나한테 접근할 것 같아 선택한 답안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넜다. 남자가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도로 건너편을 봤는데 남자가 나와 평행선 게임을 하듯 도로 반대편 길을 걷다가 내가 쳐다보자 갑자기 가로수 은행나무 뒤로 숨었다. 몸을 가리지도 못할 어린 은행나무 뒤로 숨는 행동은 내 의심이 합리적이란 증거였다. 불안은 또다시 잘못된 판단을 유도했다. 남자와 거리를 벌리려고 지름길인 야외 공영주차장 쪽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남자가 길을 건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호신용품을 양손에 꼭 쥐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내 엉덩이를 만지고 유유히 사라지는 일을 겪은 뒤 구입한 물품이었다. 이른 저녁 걷는 사람이 많았던 동네 거리에서, 더군다나 옆에 친구도 있는데 당한 성추행이었다.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마련한 스프레이와 경보기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필요하게 될 줄이야...

치안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치안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고 생각되어 호신용 경보기의 핀을 뽑고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시끄러운 소음에 체구가 작은 20대 초반의 남자도 따라 멈췄다. 붉어진 얼굴과 풀린 눈은 술이나 마약에 취한 것처럼 보였고 그의 바지춤은 보란 듯이 활짝 열려 있었다.

! 너 미쳤어?”

새된 소리로 외치며 경보기를 던지는 시늉을 하자 남자가 흠칫했다.

따라오지 마!”

용기를 내 경고하고 뒷걸음질하는데 남자도 똑같이 따라 움직였다. 남자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분사된 액체가 따가운지 충혈된 눈을 껌뻑거렸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가야 할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다시 뒤를 확인했을 땐 어디로 사라졌는지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정신없이 회사를 향해 걸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폭포수같이 쏟아졌다.

치안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치안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이날 근무를 마친 후 집 대신 경찰서로 가 익명의 남자를 신고했다. 눈물을 훔치며 진술하는 내용을 아버지뻘의 경찰관이 귀담아들었다. 남자가 찾아올까 봐 무서워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 경찰의 조언대로 2주간 친구 집에 머물렀다. 출퇴근 길이 두려워져 자동차를 구입하고 부동산에 가서 새로 이사할 집을 알아봤다.

2022,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조용한 주거지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지만 홀로 어두운 길을 걸을 때면 잠재된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주위를 경계하게 된다. 이런 기억 없이 누구든 방방곡곡을 누릴 수 있다면 진정한 치안 강국이 되지 않을까.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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