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래 서산시대 객원기자
임정래 서산시대 객원기자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란 드라마가 인기리에 종영됐다.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 주었다며 드라마를 격찬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독자들은 장애인보다는 천사 같은 외모와 천재적인 논리와 암기력에 열광하는 것으로 보였다. 주인공 우영우를 보면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모습을 통하여 대리만족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실재 우리주변의 장애인은 우영우 보다 외모가 뛰어나지도, 지적능력이 우수하지도 않다. 약자인 우영우를 믿고 보호하는 주위 인물들은 현실세계에서 과연 존재나 할까? 필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본다.

약자보호는 사회의 몫일 뿐 개인의 몫은 아니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무관심이 곧 사회의 무관심으로 귀결된다.

드라마 우영우에 나온 인물 중 현실에서 존재하는 모습은 우영우 아빠가 유일하다. 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오직 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딸바보 아빠들의 공통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장애를 정신적 혹은 육체적 장애로만 인식한다.

최근에는 육체적 정신적 장애 외에 또 하나의 장애가 존재한다. 바로 경제적 장애계층이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하여 항시 약자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하다 보니 집값을 따라가기에는 무리, 자녀들 또한 교육기회를 박탈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자연 최저시급으로 살며 영원히 약자계층으로 남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Banjiha(반지하)란 단어는 기생충이란 영화를 통하여 세계에 알려졌고 강남의 물폭탄을 통하여 한국 사회를 조명하는 전 세계적인 용어가 되었다. 반지하에 사는 계층은 햇살을 보는 것 마저 제한적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는 높이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발바닥 높이에 눈을 맞추고 살아가야만 하는 계층이다.

채용의 부당성을 호소하며 조건을 무시하고 공정만을 주장하는 권민우 변호사는 우리사회의 자화상일 것이다. 우영우의 친구는 이런 사회를 향해 정작 학교에서 1등하던 너만 아무데도 못갔어. 그게 불공평하다는 거는 다들 알고 있지만 그냥 자기 일 아니니깐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라고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현했다.

우영우는 그 친구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라고 칭해준다. 약자계층에 우리사회는 과연 봄날의 햇살이 되어 반지하방에 햇빛을 양보하고 있을까!

가난한 자의 자식과 부자의 자식이 동일한 대학등록금을 부담하고 걷기가 불편한 장애인과 걷기가 수월한 비장애인이 함께 달리기를 하는 사회는 봄날이 아니라 햇살의 독점에 불과하다.

평생을 노동하며 최저생계비를 빼고 저축을 해도 강남에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그늘을 보여준다.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경쟁시키고 경제적 부에 의하여 서열을 나누는 것 또한 약자에게는 매서운 칼바람이다.

신은 차별없이 햇살을 나누어 주었지만 인간은 약자에게 햇살 대신 칼바람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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