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스치며 지나간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었기 때문"

건설현장의 여장부 서른아홉 해를 산 최은지 씨의 짧은 인생 긴 이야기

프롤로그

예닐곱 살이 되기 전부터도그녀는 동네 모퉁이를 돌아 칡을 캐러 다녔다. 그곳에서 운 좋으면 뱀도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처음 본 칡꽃은 유난히 반짝이는 보라색이었다. 커서 칡꽃처럼 반짝이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과 함께 아버지의 폭력, 부모님의 갈등, 혼자라는 외로움, 희망이 배제된 하루살이 인생을 살면서 어린 나이에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지난 26일 서른아홉 해를 건너는 최은지 씨가 파주에서 서산으로 내려온단 소식을 듣고 점심을 함께했다. 긴 머리를 묶은 그녀의 모습은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여자의 몸으로 건설현장에 뛰어들어 험한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던 은지 씨는 차가운 주스를 한 모금 길게 마시더니 입을 뗐다.

애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제겐 버거운 남자였죠. 간단히 설명하면 함께 했어도 미혼모 같은 느낌일까요. 하지만 이젠 감사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성장시켜준 것이 바로 애들 아빠거든요. ‘아빠, 당신의 삶을 응원해. 행복했음 좋겠어라고 애들아빠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고 싶어요. 멋진 엄마로 아이들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거든요. 제가 힘든 시절을 겪어봐서인지 우리 아들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맑아진다는 은지씨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맑아진다는 은지씨

Q 어린 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다. 당시 얘기들을 들려달라.

서산시 운산면에서 목수였던 아버지 사이에 1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라곤 하지만 오빠와는 10, 언니와는 8살 차이로 태어나서인지 내겐 형제라기보단 어쩌면 부모님 같은 존재들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언니는 나를 업어서 키웠고, 그것도 모자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수업을 받을 정도였다.

우리는 서로를 챙기며 의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슴푸레 저녁이 오면 그때부터 우리는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지나친 가부장적 성향에 알코올중독까지 있던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를 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많이 우울했다.

집 앞 밤나무에 밤송이가 떨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새벽녘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엄마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7살 어린 마음에도 이대로 나가면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벌떡 일어나 엄마를 눈으로 쫓으며 달려나갔다. 급하게 나오느라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내 작은 발에는 수북이 떨어진 날카로운 밤송이 가시들이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밤송이는 어쩌면 내 작은 심장까지도 파고들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엄마를 찾아다녔다.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다 어두컴컴한 밤나무 아래 울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달려가 엄마를 안았다. 엄마 냄새가 그렇게 달았던 적이 없었다.

내 발을 본 엄마는 깜짝 놀라며 깊게 박힌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서야 엄마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있을 거란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가시를 뽑아내는 통증이 얼마나 크던지.

태안한결로타리 민인애 회장이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은지씨
태안한결로타리 민인애 회장이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은지씨

Q 살아가면서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중학생 때였다. 아버지가 큰 돌을 엄마 머리 위로 던졌다. 만화 속에서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오던 장면과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엄마가 잘못되는 줄 알고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우리 아버지를 가만히 두질 않았을 것이다.

목수일을 하신 아버지는 월급날만 되면 행방불명이었다. 어떤 날은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가 길거리에 돈을 뿌리며 주워가라고 소리를 치곤 했다. 내 어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엄마는 항상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늘 화가 난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이었다. 이런 우리 집 환경이 너무 싫었다. 항상 떠나고 싶었다. 누구에게 내 마음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을 보며 앞으로의 내 삶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세상을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 버거웠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빠는 집을 멀리했고, 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입대를 해버렸다. 언니는 그런 아빠가 싫다고 서울 여의도 야간고등학교로 떠났다.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했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더 진한지 술 취해 길거리 어느 틈에 쓰러진 아버지를 모른척하며 지나친 것이 지금까지 가슴 언저리에 뻐근히 맺혀있다. 친한 친구들이 이런 아버지를 보며 흉을 보는데도 나는 왜 우리 아빠야라며 말 한마디 못했을까.

참 희한하다. 예전에는 그렇게 밉던 아버지가 이젠 약해진 모습으로 계신다. 함께 할 시간이 짧다고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를 생각했던 내가 지금은 부모님이 계셨기에 우리 아들 태우와 준수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사하다.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자신을 다독이는 은지씨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자신을 다독이는 은지씨

Q 일찍 결혼했다. 그때 얘기를 들려줄 수 있나?

그 얘길 하려면 내 살아온 얘기가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떤 분들은 아궁이가 나온 작품을 보면 한국인의 정서가 느껴진다며 상당히 좋아하신다. 나는 예외다. 나는 싫다. 우리 집은 아궁이를 사용했다.

한창 예민하던 고등학교 시절, 교복의 불 냄새는 늘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늘 짜증을 내며 학교에 다녔던 그 시절, 심지어 과자와 음료수 대신 우리 집 간식은 칡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유난히 칡이 잘 나왔다. 자줏빛 칡꽃이 만발한 8월이면 1년치 간식을 찜해놓기에 바빴다.

어쨌든, 애정 결핍이 병이 되어가던 고2 , 21살 애들 아빠를 만났다.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챙겨주는 모습에 빠져 사랑을 했다. 입대한 그와 나눈 편지들은 살아가는 기쁨이었다. 이런 내 맘도 모른 채 아버지는 다시 학생이 무슨 군인이랑 연애하냐며 집으로 온 편지를 싸그리 불태우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넘은 사랑은 19살이 끝날 무렵 막을 내렸다. 대학을 포기하고 천안에서 오전에는 미용학교에 다녔고, 오후에는 미용실과 사임당 피부샵, 새벽에는 호프집에서 아침 5시까지 일을 했다. 파김치가 된 몸을 친구 자취방에서 2~3시간 쪽잠을 자는 것으로 보충했고.

가난해서 서러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많았던 시기였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길잡이가 되어주는 능력 있는 엄마가 되자라고 결심했다. 그러던 사이 제대한 그를 다시 만났고 사랑의 결실이 생겼다.

아이들을 위해 편지를 쓸때마다 가슴이 벅차다는 은지씨
아이들을 위해 편지를 쓸때마다 가슴이 벅차다는 은지씨

Q 특별히 고마운 분이 있다고 했다. 어떤 사연인지 궁금하다.

의사선생님과 애들 아빠에게 고맙다.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해버렸다. 소중한 생명을 얻었지만 나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 나이 겨우 스무 살, 당시의 그와 나는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고심 끝에 지우기로 하고 자모산부인과를 찾았다. 당시 의사 선생님께서 내 딸이랑 동갑이네하시며 상당히 마음 아파하셨다.

그렇게 수술 5분 전,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 이런 아이를 어찌...’ 서둘러 수술대를 내려와 바렸다. 당시 의사 선생님은 잘 생각했다며 어린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그렇게 내게 소중히 다가와 함께 해준 아들이 우리 태우다.

애들 아빠에게 살면서 가장 고마운 순간이 있다면 그 당시 아들 태우를 지켜준 것이다. 그 덕분에 나를 첫 엄마로 만들어 준 이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장남 태우. 당시 나를 가엾게 바라보시며 안타까워하신 변완수 의사 선생님도 내겐 감사할 분이다.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의 태우와 나, 그리고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기위해 주말마다 서울로 공부를 하러다닌 은지씨
아이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기위해 주말마다 서울로 공부를 하러다닌 은지씨

Q 힘들 때마다 감정조절을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어떤 식으로 하나.

나 자신에게 하는 거다. “은지야. 너 오늘도 할 수 있어. 너는 무조건 다 할 수 있어. 나는 너만 믿어라고 주문을 하면 뭔가 시련이 닥치더라도 막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렇게 희망을 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거다. 신세 진 언니들에게 맛난 것도 사주고, 쓰고 싶은 것도 맘껏 쓰고, 자유로운 시간도 조금은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가부장적인 성격과 억압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가정에서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 이런 현실적 괴리 때문에 내적 갈등도 심했음을 고백한다.

그즈음 참치전문점을 오픈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직격탄은 상상 이상이었다. 살려고 발버둥 쳤지만 더는 어찌하지 못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빚을 떠안으며 가게를 접었다.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이 세상 끝난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7개월 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오직 집에만 박혀 살았다.

난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집콕을 하며 술과 눈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무려 체중이 24kg이나 불어있었다. 가장 미안한 것은 아이들이다. 항상 울고 있는 엄마로 기억할까 봐. 항상 무너지는 엄마로 생각할까 봐.

그 당시 힘든 나를 세상으로 끌어낸 분이 바로 김종훈 강사님과 장광재 원장님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직업이 안전선생님이었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소통하면서 내 속에서 잊고 있었던 열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활비도 필요했는데 안전선생님은 일거양득이었다. 아이들 덕분에 에너지를 받으며 다시 재기하자. 다시 멋지게 내 인생 만들자고 다짐했다.

태안 만리포에서 야영캠핑장을 오픈한 은지씨
태안 만리포에서 야영캠핑장을 오픈한 은지씨

Q 그즈음 야영장을 오픈했다. 그 얘기를 해달라.

맞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할 시기에 죽어가는 야영캠핑장을 운영할 기회가 생겼다.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야영캠핑장이지 낡은 폐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간절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만리포청솔야영캠핑장. 내 소중한 일터에서 죽을힘을 다한 결과 1년 사이에 대부분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지난해를 생각하면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나조차도 아득하다. 꾸미기 좋아하는 내가 한 푼이라도 더 모아 빚을 갚겠다고 크림 하나도 제대로 바르지 못하고 살았다. 손님이 없는 날에는 설렁탕집에서 설거지를 하며.

정말 감사한 것은 좋은 시설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찾으신 고객들이 재방문 해주시고, 불평불만보다는 늘 감사하다고 해 주신 인연들이다. 특히 야영캠핑장을 운영하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나의 사람들. 올해 또 야영캠핑장을 재계약했다. 나를 믿고 와주신 낭만손님들에게 조금이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마르지 않은 샘을 또 하나 팠다.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는 은지씨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는 은지씨

Q 야영캠핑장 꾸밀 돈을 벌기 위해 현재 주중에는 파주 건설현장에서 현장직 일을 하고, 주말에는 서산집으로 내려와 아이들을 챙기고, 또 태안 만리포에서 야영장을 운영하고. 일인다역을 하는데 힘들지는 않나?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1 2 두 아들을 애들 아빠에게 맡겨두고 파주 건설현장으로 투입되기까지는 큰 결심이 뒤따랐다. 사실 나는 건설현장이라고 하면 아파트만 짓는 그런 곳인 줄 알고 찢겨진 허드레옷만 가지고 올라갔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곳은 반도체 건설현장이라 환경도 깨끗하고 작업복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온 파주에서 생각지도 못한 추억들도 생겼다. 무엇보다 맘 좋은 팀장님과 안전담당자님, 반장님들을 잘 만나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사람은 늘 새로운 환경과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 것이 맞나보다. 나 또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갈 일이 없었을 파주 건설현장.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 파주는 은지 인생에 또 다른 기회와 깨달음을 준 곳이다. 13. 여자의 몸으로 업무를 해나가기에는 벅찬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던 나로서는 못해낼 일도 아니었다. 꿈과 희망만 있다면 가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다. 신은 감당할 만큼의 시련만 주시니까.

태안한결로타리 회원인 은지씨
태안한결로타리 회원인 은지씨

Q 엄마를 보면서 두 아들은 어떤 말을 하는지?

오히려 엄마 걱정을 해주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나이에 비해 성숙해서 더 마음이 아프다. 어린 나이에 낳은 걸 알고 꽃다운 나이에 고생했다. 이제라도 엄마 인생 살라고 응원해 준다. 친구 같은 아들들이다. 우리 아들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인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겐 우리 아이들의 존재가 우주만큼 크고 넓다.

야영장을 하면서 다시 꿈을 키우고 있는 은지씨
야영장을 하면서 다시 꿈을 키우고 있는 은지씨

Q 앞으로의 꿈은 뭔가?

하나뿐인 내 인생 함부로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정말 가치 있게 살고 싶다. 그러다 보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꿈이다. 그중에서도 미혼모를 도와줄 수 있는 시설이나 복지를 만들고 싶다. 어린 나이에 애들 아빠를 만나 아기를 낳았지만 마치 내가 미혼모 같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미혼모를 보면 나를 본 듯해서 자꾸 손길이 간다. 그들을 돕고 싶다.

그다음은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여행을 하고 싶다. 일찍 시집을 가서인지 나는 우물 안 개구리다. 기회가 된다면 캠핑카 하나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도 하고 싶고, 한적한 곳에 정착해서 통기타를 치면서 캠프파이어도 하고 싶다. 그리고 삼겹살을 앞에두고 소주잔 기울이며 세상얘기를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브랜드를 개발하여 내가 없어도 운영이 되는 멋진 사업시스템을 하나 만들고 싶다. 수익 창출이 된다면 위 2개의 꿈은 아무 탈 없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

함께하는 분들이 있어 꿈과 희망을 품는다는 은지씨
함께하는 분들이 있어 꿈과 희망을 품는다는 은지씨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나이에 비해 산전수전을 다 경험했다. 그로 인해 스스로 자책하며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지? 나는 왜 안 되지?’라고 좌절하기도 했다. 자살 시도도 3번씩이나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된다. 정말 바보 같은 행동들이다.

그러다가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한 번뿐인 내 인생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자. 남 눈치 보지 말고 의사 표현을 하면서 살자.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라는 걸 알았다. 깨달았다.

나는 발견했다. 인생을 살면서 정확한 자기 꿈과 계획, 간절함, 동기부여, 그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단단해지는지를. 내가 그랬다. 내가 이렇게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를 스치며 지나간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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