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모 청주일보 총괄 본부장

인간이 생존을 시작한 원시시대부터 존재한 ‘패거리즘’은 그 역사가 길고도 멀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진보․보수의 패거리즘은 변형되고 비뚤어진 친일과 용공의 구호만 난무하는 괴물로 진화했다.

극심한 패거리즘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끼치며 명분과 방향이 정확하지 못하면 국운을 쇄하게 만든다는 것이 동·서양 고금의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민주주의 시초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로마 역시 흥망성쇠에 극심한 패거리즘으로 인한 권력의 부패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우리나라 국운을 쇄하게 만든 최악의 패거리즘으로 지목받는 조선시대 파당경쟁의 단초를 제공한 이는 아이러니컬하게 충절의 고장 충청도 출신의 대학자인 우암송시열로 노론이라는 패거리 단체를 만들면서 국론분열로 조선은 하락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후 노론·소론·동인·서인·남인·북인 등의 당파싸움으로 국가가 허약해지자 왜구로 비하하던 일본에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이하면서 조선의 도공 등 30만 명의 수공업 기술자들을 납치해간 일본에게 뒤 떨어져 한일합방이란 치욕스런 국치를 맞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가의 패거리즘과 달리 당시 조선의 지방 패거리인 토호의 시초인 관아에는 고을 수령 외에 토호세력인 절정인 육방(이·호·예·병·형·공)이 있으며 이중 우두머리는 이방이고, 밖으로는 지역양반들의 모임인 유향소가 있었다.

이들 육방은 월급이 없이 고을을 운영하는 수령이 주거나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 조달해서 경비를 충당해 이들이 토호세력으로 변모해 종국에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비호세력 겸 토호세력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런 구조 속에 육방이 토착화돼 지역양반들인 유향소와 짜고 신임 수령을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이들과 짜고 지역을 수탈하는 토호세력으로 발전하는 일이 잦았다.

토호세력과 비호세력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피해가 쌓여 국운에 쇄락하던 조선시대 말기에 민중봉기의 시초인 동학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600여년 에 걸친 조선왕조 시대의 결말이 권력욕이 앞선 패거리 즘과 파당이 지나쳐 민초들의 삶이 피폐해져 국가의 중심인 백성이 쓰러지면서 결국은 국가가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은 자의적으로 멸망 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탈과 권력과 사욕에 찌든 일부 매국노들이 국가를 배신하고 백성들을 팔아먹은 것이다. 고난의 일제치하 36년인 한일합방이 시작된 을사늑약을 맺은 치욕스런 11월 17일이 지나가 버렸다.

친일과 용공을 내세워 패가름으로 세력을 굳혀가는 진·보수 시민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은 시위에 등장한 물대포에 함몰돼 경술국치인 17일 을사늑약의 치욕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상한 태도를 보였다.

친일과 용공이 난무하는 진·보수의 시위 끝에는 정치권이 존재하며 그 뒷자락에는 수권정당과 불임정당의 치열한 파당경쟁도 존재하며 수권을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혼돈의 세월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패가름의 혼돈 속에 국가를 지탱하는 보루인 공권력에 대해 진·보수로 갈라져 옹호와 비난으로 나뉘어 백성들에게 패가름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국론 분열로 인해 국가의 성장 동력이 쇠퇴해 발톱 빠진 용으로 묘사된 것이 몇 년 지났건만 아직도 여당답지 못한 여당과 야당답지 못한 야당이 존재하고 있어 국정의 난제가 생길 때 마다 여당도 야당도 아닌, ‘요당’이 전면에 나서 국론의 반전을 위해 국민을 속이는 사기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국가의 이슈나 난제는 여의도에서 풀어야하나 툭하면 무단으로 집 나와서 우리 집구석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수치를 모르는 팔푼이 같은 정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참으로 수치스럽고 안타깝다.

시위니 테러니 대다수 국민들은 관심 없는 먼 나라 이야기로, 현재 국내 경제는 서민들이 먹고 살기 막막한 현상으로 갈수록 어려워져 가고 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요당이든 정치권이나 시민운동가들이 이제는 국론을 분열하는 투쟁을 뒤로하고 경제 살리기에 전념해 국민의 어려운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정치에 힘써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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