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
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

저녁식사를 마치면 대개 해미천변을 걷는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은 너무 쉽게 푸르른 녹음에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해미천을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의 향기가 화사한 빛을 그린다.

8~9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대통령이 조깅을 하는 모습을 TV에서 보며, 공원을 걷거나 뛰는 것은 풍요롭게 사는 외국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지역의 주민들도 건강을 위해 걷고 또 뛰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나도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매일 걷는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 한다.

사시사철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천변을 걷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해미성지까지 한 바퀴 돌고 나가시는 분들도 종종 본다. 각종 안내판을 꼼꼼히 읽으며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서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다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면, 한국사와 교회사가 어우러진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이처럼 멀지 않았던 시기의 우리 지역에서 벌어진 천주교 역사의 한 페이지가 민족의 역사 안에 깊이 새겨진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교황청이 선포한 몇 개 안되는 국제성지들은 13억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이지만, 산티아고 국제성지의 경우 실제로 방문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다. 마치 불자가 아니어도 산사에 들어가 목탁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맑은 영혼샘물을 마시고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걷기운동의 유행과 맞물리며 성지순례도 문화 흐름의 한 현상을 열어갈 것 같다. 도보 순례자들은 역사와 문화의 발자국에 각기 자신이 걸어가는 삶의 의미를 비추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충전해서 돌아갈 것이다.

해미성지가 국제성지로 선포된 이후, 찾아올 순례자들을 생각하면 기쁘기도 하지만 지금의 열악한 상황을 바라보면 두렵기도 하다. 현재의 순례문화와 한국에 집중되는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반영할 때, 종교를 넘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이웃 종교의 깊이까지 체험하려는 순례를 예상할 때, 갈 길은 멀어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헌신적인 서산시와 지역 주민, 지역의원의 애정 어린 관심과 도움에 힘입어 주변을 정비하고 해미성지의 문화유산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계획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차곡차곡 마음을 함께 담아간다면, 해미가 품은 보편적 인류애와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와 역사의 가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 이 곳을 방문한 사람의 마음과 눈을 밝혀 주리라 믿는다. 희망과 치유를 찾아 서산에 도착한 순례객들을 위대한 우리 정신문화유산의 품안에 맞아들일 날을 기쁘게 그리며 오늘도 해미천변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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