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 97

종갓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일 년에 열 번쯤 되는 제삿날이 다가오면 엄마는 시장에 가서 제수용품을 한가득 샀다. 그 많은 걸 들고 버스에 올라탄 엄마는 마을 입구에 내려서 짐을 머리에 인 채 완만한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모시는 조상은 아버지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였으나 재료를 구입해 손질하고 제사상에 올릴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건 엄마 몫이었다.

서울에서 세탁소를 하는 삼촌, 숙모들은 명절인 설과 추석에만 내려오는 게 관례였다. 그것도 명절 당일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로. 내가 기억하기로 명절과 제사 때마다 매번 꼬박꼬박 엄마를 도와주는 사람은 같은 지역에 사는 작은할머니뿐이었다.

명절에는 긴 연휴가 존재하고 만들어야 할 음식양이 많아지는 만큼 거드는 손길도 늘었다. 이를테면 작은할머니의 며느리, 외지에 살다 고향에 방문한 미혼의 딸들, 오빠가 결혼한 후에는 며느리까지.

아빠는 제삿날 당일 이른 저녁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 생밤을 쳤다. 그리고 자정이 될 즈음 제기에 준비된 음식들을 홍동백서에 맞춰 상에 올리는 일을 했다. 조상님께 제사를 지냈다. 제사 때마다 장을 볼 수 있게 일정 금액을 엄마에게 건네는 역할도 했지만 한번 책정된 금액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물가를 고려하지 않은 액수였다. 적은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마련하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고심하는 줄 모르는 꽉 막힌 처사였다.

이런 사정도 모른 채 그 시절의 나는 제사가 잦아 좋았다. 지금은 제사 음식이 특식으로 여겨지지도 않는 시대지만, 그때는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을 굽는 프라이팬 옆을 기웃거리면 막 구운 따끈하고 맛있는 음식이 입에 들어왔다. 제사가 끝난 직후는 말할 것도 없다. 막내의 특권으로 콩나물 다듬기, 꼬치에 산적 끼우기 외에는 구경만 하던 철부지가 늦은 시간, 가끔은 자다 깨서 졸린 눈을 부릅뜨고 음복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들이 서서히 달라졌다. 운전을 하는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작은할머니가 제사에 오지 못했다. 교통 문제도 있거니와 음식준비를 돕기에는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명절에 우리 집과 작은 집이 따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 많은 딸들이 모두 출가했고 삼촌들은 명절에도 더이상 고향에 내려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들에게 지워진 부담을 줄여주고자 제사를 단촐하게 정리했고 엄마는 손이 많이 가는 전 종류를 시장에서 주문하기 시작했다. “제사는 우리 대에서 끊어야지말씀하시는 부모님에게서 시대적 흐름에 따른 고민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시아버지의 고민 때문이다. 큰집에서 더는 제사를 지내기 힘들다 하셨다. 코로나19 이후 작은집에서는 제사에 오지 않고 있다. 고향에 사는 큰집 첫 조카는 직장 일이 바쁘다고 제사를 거부했다. 서울에 사는 큰집 둘째 조카는 다 같은 아들인데 왜 첫째아들만 제사를 지내야 되냐고 반문했다. 고로 셋째인 시아버지에게 제사가 토스 된 것인데 시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나는 못한다고 강하게 거부했다.

34녀 중 3남인 시아버지는 최근 남편에게 그 소식을 전하며 자식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부모 제사를 안 지낼 수 있냐고 말했다. 아들의 생각을 여러 차례 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그래서 너의 생각은 어떠냐

정말 시대가 많이 변했다. 코로나19로 더 빠른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이다. 몇 년 전 시골집을 마련하시면서 시아버지가 남편을 조용히 불러 말씀하셨다. “마당 입구 저 소나무 밑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다수목장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부모님의 준비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남편은 이제 나에게 말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일이 돌아오는 주말에 생전 좋아하셨던 음식을 잔뜩 준비해 시골집으로 가자고. 같이 부모님을 추억하고 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자고.

그러나 시아버지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그래서 너의 생각은 어떠냐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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