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일과 악기는 나를 살리는 동시에 사람들을 살리는 일”

오땡큐머리염색 이은선 대표
오땡큐머리염색 이은선 대표

글을 열며

설상가상으로 커피가 너무 뜨거웠다. 욱하고 마셨던 아메리카노가 내 입천장을 데고 목젖으로 넘어갔다. 인상을 찡그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을 때 내 눈앞에서 색소폰 연주가 시작됐다.

넉넉한 몸매에 큰 색소폰을 목에 걸고 멋지게 가요를 연주해주었던 그녀 천연머리염색 오땡큐헤어 서산점이은선 대표.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며 내리 몇 곡을 기분 좋게 들려준 그녀는 씽긋 웃으며 부끄러운 듯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좀 전에 마신 뜨거운 커피가 잠자던 신경세포를 놀라게 했음에는 음악에 취해 통증이 사라져버렸다. 파워풀한 악기 소리에 카페에 앉아 연주를 듣던 관객들은 손바닥이 얼얼한 것도 잊은 채 박수를 보냈다.

이때가 벌써 2년 전 어느 카페에서 장학금 전달식 식전공연에서 그녀를 처음 대면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지난 4서산시 서령로 4’ 천연머리염색 오땡큐헤어서산점에서 이은선 대표를 다시 만났다.

색소폰과 혼연일체로 살아가고 있는 이은선 대표
색소폰과 혼연일체로 살아가고 있는 이은선 대표

Q 오랜만이다. 2년 전보다 더 젊어진 것 같은데 비결이라도 있나?

아무래도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세상 가장 좋아하는 색소폰을 벗 삼아 살아가니 그런 것 같다. 지나고 보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아직도 자기가 뭘 잘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50이 넘어서야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가족, , 취미, 친구, 그리고 꿈과 사람들. 앞으로의 내 삶이 가장 기대되는 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가족들과 함께
고등학교 졸업식날 가족들과 함께

Q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청양에서 간판업을 하시는 부모님 사이에 남동생 셋의 맏딸로 태어났다. 가난은 귀여움마저 앗아간 것 같다. 그나마도 바쁜 부모님 대신 할머니께 하나밖에 없는 손녀라는 타이틀로 이쁨을 받은 것밖에는 말이다.

어린 마음에도 누가 내게 짐을 지워줘서가 아닌 어렴풋하게나마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내면에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내 동생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농협 여직원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농협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여직원들이 하나같이 돈을 세고 있는 것이 어린 내 눈에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아등바등 벌고자 했던 돈들이 농협에 다 몰려있다니. 아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일단 상업계 고등학교로 가서 농협에 취직하자!’라는 포부를 그때부터 가지게 됐다.

사람들은 말할 수도 있겠다. 부친이 간판 사업을 하는데 왜 가난하냐고.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딱 세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구, ,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형제들은 노트 살 돈도 없었다. 과목별 전과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결국 어머니는 4남매를 키우기 위해 화장품 외판원을 하셨고 나는 틈틈이 동생들을 건사하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리고 나는 농협에 입사하기 위해 대전여상으로 진학했다.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이은선 대표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이은선 대표

Q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내 남편은 교사였다. 나는 간간이 남편에게 이런 말을 곧잘 했다. “문제아동과 그렇지 않은 아동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 차이도 안 된다.”

이유가 있었다. 누룽지만 몇 날 며칠 끓여 먹는 형편에서도 부모님은 교육열이 대단하셔서 맏딸인 나를 대전에 있는 여상에 보내주셨다. 혼자서 밥해 먹고 학교에 다니다 보니 자주 굶고 (학교)가는 날이 많았다. 보다 못한 친구가 어느 날인가 자취방으로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사건은 여기서부터다. 2 때였다. 학교 규율부도 나와 같은 학년이었는데 밥을 먹다 보니 그만 지각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간발의 차이로 규율부 학생들에게 집히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자존심도 상하고 성질이 나서 “9시까진데 바로 앞에 간 애들은 들여보내 주고 우리는 왜 안 되느냐? 명단을 빼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규율부는 단호했다. 친구와 함께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취방으로 와 버렸다. 우리는 결국 땡땡이를 치게 된 상황이 됐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다음날 등교한 우리는 종일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오후 늦게 담임 선생님께서 둥둥 부은 우리 눈을 보시곤 인자한 목소리로 교실 들어가기 전에 세수하고 눈이 좀 가라앉으면 그때 들어가라고 배려해주셨다. 그때부터 고3 때까지 친구와 나는 문제아로 낙인찍혀 늘 요주의 인물이 돼야만 했다.

나는 지금까지 생활기록부를 떼 본 적도 동창회에 나가본 적도 없다. 그 트라우마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것 같다. 그런 이유로 교사 남편에게 결과만을 보지 말고 상황을 보라고 말해줬다.

Q 예민했던 시기에 가난으로 인해 속상함은 없었는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은 내 고향 청양. 시골에서 등잔불을 지피고 살았던 나는 늘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하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졸업식이 다가왔다. 학력이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대부분 굵직한 상들이 주어졌다. 하지만 내게만은 그 어떠한 상도 내정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가정 형편상 수업료를 미처 내지 못한 나. 이제 이틀 밤만 자면 졸업식 날이었다. 정작 졸업식장에도 나가지 못할 위치에 놓인 딸을 위해 부모님께서는 사방으로 다니며 돈을 꾸어 졸업식 전날 아침 수업료를 내주셨다. 그리고 내게는 동네 목사님 상을 만들어 주었다.

하마터면 졸업 대상 명단에도 나는 없었겠구나!’란 걸 생각하면 그저 아찔하다. 이런 과거가 있었기에 여유롭지 않은 결혼생활에서도 남편에게 혹시 돈이 없어 수학여행 못 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한 해에 한명씩은 꼭 데리고 가라며 수학여행비를 몇 년 동안 몰래 넣어주기도 했다. 사실 남편도 나처럼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기에 내 의견에 고마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Q 평생 가슴에 맺힌 사연이 있다면?

내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갓 부임한 총각 선생님이 자습하는 동안에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맘대로 가지 말고 꼭 얘기하고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화장실은 가고 싶어 죽겠는데 선생님이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 결국 다녀오게 됐고, 그 사이 선생님은 교실로 와 내 자리에 딱 서 계시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본보기로 내 뺨을 살짝 때리셨다. 자존심도 상하고 너무너무 억울했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이 교실을 나갔다고 생각하곤 욕을 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는 간판 가게 뒤에는 쉴 수 있는 방이 있었다. 학교를 파하면 나는 주로 가게 딸린 방에 있곤 했는데 아버지는 간판 일이 끝나면 술 좋아하시는 친구분들과 일상적인 욕을 하며 저녁 시간 술을 마셨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욕이란 걸 인지하지 못하고 일상적인 대화로만 알았던 나는 굉장히 원색적인 욕을 선생님께 했던 것 같다.

잠시 후 선생님은 반 전체 아이들의 눈을 감게 한 뒤, 쪽지를 나눠주며 이름 쓰지 말고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했다. 순간 나를 위한 선생님의 배려란 걸 깨닫고 가슴이 먹먹했다.

미안하고 창피하고, 아무튼 말 할 수 없는 심경에 쪽지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연필을 몇 번이고 꾹꾹 눌러쓰며 잘못했다는 말을 적었다. 살아오면서 늘 죄스러운 마음이 마음 한 켠에 남아 나를 부끄럽게 했다.

6학년 담임 선생님께 그동안은 용기가 나지 않아 용서를 빌지 못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꼭 찾아 뵙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지난 2월 반영구화장 자격증을 취득하며
지난 2월 반영구화장 자격증을 취득하며

Q 염색방을 운영하고 계신다. 어떤 이유에서 하게 됐는지?

열심히 살아온 만큼 나한테 남겨진 게 없을 때의 허무함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공허하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23년이었다. 외출도, 좋은 것도, 맛난 것도, 부러울 것도 없을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다. 약을 먹어도 공허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문득 어딘가에 미쳐보기로 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색소폰과 천연 머리염색이었다. 머리방은 자격증을 취득해야 개업할 수 있기에 늙어서 용돈 벌이도 하고, 봉사도 하자는 심정으로 내 나이 52살에 학원에 등록하고 이듬해 6월에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생애 최초 내 손으로 염색방을 개업했다. 고객들의 머리는 내 머릿결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사업에 임했다. 그 시간이 어느새 10년이다. 역시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다시 반영구화장 1급 도전에 나섰고, 지난 2월 말 자격증을 취득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배우는 것도 망설여지게 됐지만, 또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게 될까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더라. 그래도 환갑이 지난 나이에 결과물을 품에 안으니 또다시 감동이 밀려온다.

용돈을 모아 세고비아 기타를 산 날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용돈을 모아 세고비아 기타를 산 날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Q 색소폰을 배우고 지금은 색소폰동호회에서 교육 봉사를 담당하고 있다. 피아노와 기타도 치는 것 보면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글쎄, 재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도 부끄러움이 워낙 많아 음악실기시험도 끝까지 부르지 못한 소심한 학생이었다. 그래도 신기하게 악기만 보면 심장이 뛰었던 것 같긴 하다. 하긴 나도 모르는 내가 내 속에 있을 수도 있겠다(웃음).

중학교 때였다. 친구네는 아버지가 형사에다 전축이 방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전축 옆에는 꿈에 그리던 기타가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땐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다. 친구는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오빠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서툰 기타 솜씨를 내게 전수해 주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기타가 머릿속을 뱅뱅 돌 즈음, 고등학교 때 드디어 용돈을 모아 세고비아 기타를 가지게 됐다. 잘 치지는 못했지만, 선생님들은 수학여행이나 소풍 때마다 내게 연주를 부탁했다. 이런 것들이 모여 나는 어느새 음악소녀로 이름을 날렸다. 덤으로 소극적이었던 성격도 서서히 외향적으로 바뀌어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 대신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면서 피아노학원에 다녔다. 모든 악기의 기초가 피아노란 걸 알곤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후 10년 만에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중고 피아노를 가지게 됐다. 얼마나 신나던지 저녁마다 연습했다.

서산색소폰동호회원들과 함께
서산색소폰동호회원들과 함께

피아노 덕분에 쉰이 넘은 나이에 배우게 된 색소폰을 힘들지 않고 배울 수 있었다. 2년째 (색소폰)불고 난 후 서산색소폰동아리 활동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6년 동안 40여 명의 회원들 중 신입회원 초보자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미 절반의 인원수를 가르쳤고, 현재 그들과는 함께 공연을 다닌다.

보물1호 아들, 며느리, 손녀
보물1호 아들, 며느리, 손녀

Q 제자들과 함께 음악공연도 다니는데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 있다면?

회원 중에 한 분이 뇌출혈로 수술을 하셨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한쪽 입과 손이 어눌하셔서인지 본인이 먼저 차라리 피아노를 치는 건 어떠냐?”고 하시길래 그럼 입은 어떻게 하겠느냐?”며 색소폰을 권해드렸다.

이튿날부터 그분과 나는 재활 훈련 차원으로 색소폰교육에 임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끝이 없는 것 같다. 막상 가르치다 보니 욕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 소리 하나 나지 않길래 내심 실망하던 차 드디어 기적을 만났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한 덕분에 6개월 만에 어설프지만 에델바이스 곡을 끝까지 불게 됐다.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그 양반을 붙잡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가르치는 분들은 보람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오늘도 가르치는 것 같다.

카페에서 공연을 하면서
카페에서 공연을 하면서

Q 교육받는 분 중 연배는 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은퇴하신 분들이 주로 많이 오시는데 그래도 60대는 너무 젊으신 분들이고, 일흔이 넘으신 분들도 많으시다.

얼마 전에는 서산 지곡면 도성리 이장님을 중심으로 85세 어르신까지 색소폰을 배우신다고 단체로 오셨다. 낮에는 농사일에 매달리시고 저녁이 되면 악기를 배우신다. 처음에는 악보 볼 줄도 모르시던 분들이 이제는 악보는 물론 고향의 봄을 연주하신다.

이분들을 보면서 ~ 세상에는 안되는 것이 없구나!’란 걸 깨달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낮에 염색방에서 일하다 보면 꾀를 부리고도 싶어진다. 하지만 그 멀리서 저녁마다 예닐곱 분씩 나오시는데 내가 없으면 어떡하냐는 생각에 피곤한 몸을 끌고서라도 가려고 서둔다.

제일 감사한 건 내 취미를 인정해주는 남편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제2의 청춘을 맞은 김은선 대표의 환갑날
제2의 청춘을 맞은 이은선 대표의 환갑날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난달 취득한 반영구화장이 내 삶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다. 나의 인생 2막은 머리염색방과 반영구화장, 그리고 내 신체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색소폰이 있다면 남은 내 삶은 가히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 여기에 한가지가 빠졌다. 어려울 때마다 달려와 챙겨주는 내 사랑하는 고향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시릴 정도로 고맙다. 얼마 전 여행 한 번 가자라는 것도 바쁘단 핑계로 가질 못했다. 조만간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친구야, 우리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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