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방울 냉장고 속에 흐르는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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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방울 냉장고 속에 흐르는 사연들
  • 최윤애 시민전문기자
  • 승인 2021.11.1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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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82
리모델링을 위해 잠시 집을 비우게 된 가족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 잠시 집을 비우게 된 가족

2007년에 완공된 아파트의 세 번째 주인이 되었다. 비교적 깨끗한 집이었으나 10년이 넘어가자 그 속에 사는 우리처럼 집도 나이를 먹는 것이 느껴졌다. 부동산을 기웃거려도 보았지만 신축아파트가 없는 동네라 우리 집보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동네를 떠나기는 싫었다.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다 다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내부를 리모델링하기로 급히 결정했다.

한 달간 집을 비워야 하는 조건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임시거처를 마련하는 것과 냉장고를 비우는 것이었다. 임시거처는 우여곡절 끝에 20분 거리의 빌라를 구하는 것으로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냉장고 파먹기(냉파)는 두번째 해보는 도전이었다. 단순히 비좁은 냉동실의 음식 일부를 처리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냉동실과 냉장실 곳곳에 저장된(숨겨진) 음식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없애려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한 달 전부터 가급적 장을 덜 보고 저장된 음식들을 파먹기 시작했다.

2+2 만두와 1+1 치킨너겟, 돈까스, 피자, 핫도그 등 냉동식품을 없애는 것은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의 힘을 빌릴 수 있어 비교적 수월했다. 갖가지 재료들을 구워먹고 데워먹고 끓여먹고 삶아먹었다. 올 봄에 언니 둘과 형부 둘이 직접 캔 쑥으로 만든 쑥인절미와 콩고물, 명절에 못다 먹은 송편은 떡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니께 드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사 전날 아이 둘, 어른 둘이 한 달간 사용할 세간 일부를 옮겼다. 챙겨야 할 것들이 어마어마했다. 냉기를 빼기 위해 냉장고도 싹 비웠다. 그렇게 먹어치웠는데도 남은 음식들이 있었다. 85리터 대형아이스박스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건만 장바구니 두 개 분량이 추가로 나왔다.

임시거처의 냉장고는 그것을 넣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냉장고에 넣지 못한 것들은 도로 아이스박스에 집어넣었다. 김장김치를 다 먹어갈 즈음 이사를 하게 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사 당일 보관이사를 맡기고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임시거처로 들어왔다. 하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작은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음식들의 사연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기관지에 좋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직접 딴 보리수로 만든 보리수청’, 이건 약이라며 둘째형부가 누나에게서 얻은 걸 다시 나에게 나눠준 몇 년 묵은 매실엑기스’, 주변에서 얻은 오디로 엄마가 만들어주신 생전 처음 맛본 오디잼’, 올 가을 직접 수확하여 냉동실에 얼려둔 강낭콩과 껍질땅콩’.

시어머님이 옆집에서 얻은 호박으로 긁어주신 늙은 호박채’, 작년에 시부모님이 수확한 감을 베란다에 쪼로록 널었다가 잘 익은 것만 골라 얼려두었던 홍시’, 남편과 마주앉아 손이 아프도록 껍질을 깐 생강’, 철물점을 운영하는 언니가 바쁜 와중에 직접 채를 썰어 만든 모과차’.

남편 회사에서 야유회 대신 제공한 모바일 상품권으로 구입한 순살고등어’, 어디선가 얻어서 요리에 쓰기 좋게 썰어서 얼려둔 대파’, 명절에 선물로 받은 황태채’, 식탁의자를 나눔하고 답례로 받은 배’, 아이들이 잘 먹는다고 시어머님이 최근에 또 만들어주신 열무김치 한 통’, 시가와 친정에서 받은 된장과 고추장, 고춧가루와 참깨, 들깨가루 등등.

가슴 한 쪽이 저릿해왔다. 그동안 내가 먹고 살아온 것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깨달음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여기서 어떻게든 작은 냉장고 속을 비우고 비워진 채로 새로워진 집에 돌아가는 것이 이달의 미션이다.

신혼초 인테리어

예뻐진 집에 들어가 살다보면 양문 냉장고에는 사연을 품은 음식들이 또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그것들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나눠준 이의 마음에 감사하는 만큼 빠른 시간 내에 먹어치워야지. 그리고 가끔은 주변을 돌아보며 나누면서 살아가는 미덕을 소유하고 싶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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