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재야 인문학자 ‘정무근 선생’을 통해 인생을 배우다
상태바
【인터뷰】 재야 인문학자 ‘정무근 선생’을 통해 인생을 배우다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9.28 0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가까이 하고 해외여행을 하라. 보다 넓은 세계를 만날 것이다!
재야 인문학자 정무근 선생
재야 인문학자 정무근 선생

책을 읽는다고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자꾸 어머니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멋진 문장과 내용이 나올 때면 이토록 재미있는 것을 우리 어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생동안 경험하지 못하다니...”

지난 26일 재야에 묻혀 살며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 사업체를 두고 있는 인문학자 정무근 선생을 만나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5개 국어를 할 수 있었고 6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남다른 역사적 관점과 자신만의 사고로 또 다른 가치를 찾아가고 있었다.

정무근 선생은 장병들에게 강의할 때면 독서와 여행을 하며 겪었던 이야기를 주로 많이 해줬고, 연배가 있는 분들에게는 주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그때마다 인기가 너무 좋아서 날마다 교실이 꽉꽉 찼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해외여행을 떠나보세요. 아는 만큼 보일 거예요. 꿀벌이 먹으면 꿀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듯이 읽고 떠나다 보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많을 거예요.

싱가포르를 여행하던 30대 초반의 평범한 주부가 공차를 발견하여 성공신화를 이뤘듯이, 벼룩시장과 마을버스가 벤치마킹을 통해 국내에 상륙했듯이, 여행은 보다 넓은 세계를 여러분에게 선물해드릴 거예요.”

Q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

맏이가 나고 내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다. 부모님은 경남 통영분으로 전형적인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통영시에서 세금을 1등으로 내는 집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딸이 학교에 가면 예수쟁이가 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가 이웃 동네 팔 남매 중 여섯째였던 우리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길지 않았고 3남매를 둔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장남의 숙명이 이것인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에서는 생선 하나를 먹더라도 살코기는 내 차지가 됐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 내가 살코기를 먹으면 내 여동생들은 대가리를 먹겠구나!’. 그때부터 나는 대가리와 뼈만 먹고 살코기는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그것은 적어도 오빠가 동생들에게 주는 조그만 배려였다. 그전에는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이기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Q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면 장남으로서 상당히 힘드셨을 것 같다.

힘들었다기보다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또 어느날 어머니에게 말을 듣기 전 까지는 여동생들에겐 상당히 너그러운 오빠였다고 생각했는데 반대였다는 걸 알았다. 처녀 시절 조금만 늦어도 동생들은 제발 오빠에게 말 좀 잘해주라고 어머니께 사정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이 대견스럽다고 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가난을 데려왔다. 통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낮에는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했고 저녁에는 입시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로 올라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프랑스 문학에 매료된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몸을 사리지 않았고, 목욕탕에서 세신사를 했다. 그때는 인체 청결사라고 불렀고, 또 바디클리너라고도 나름 이름 붙였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영어 과외를 하면서 내 인생이 달라졌다.

베트남 과기부장관과 함께
베트남 과기부장관과 함께

Q 불어불문학과를 다니면서 영어 과외를 했다. 전공과목도 달랐는데 어떻게 인생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내 친구들은 상당히 영어를 잘했는데 의외로 나는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어디가 가렵고 어디가 궁금한지를 금방 알아챘다. 제대 후 방학이면 서울에서 통영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무려 12군데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과외를 했다. 신입생들에게 먼저 영어 해석을 시켜보면 어디가 부족한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부분만 가르쳐 줬을 뿐인데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 우리 선생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거 같다. 과외 선생님이 가르치면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달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지금 돈으로 2,000여만 원 정도 됐다. 어머니께 생활비를 주고도 돈이 남아 저축을 할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영화 평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넘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하게 영화 평론을 좋아했다. 그곳에서 불어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바로바로 옥편을 찾아가면서 한자로 변환하여 필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모든 글자를 한자로 썼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즉석에서 써준 한시.(천상의 선녀가 잠시 내려와 노닐고 있나니/동산의 새들도 자취를 감추고 꽃마져 부끄러워하는구나/그들의 향한 내마음을 한편의 시로 보내니/제발 하늘로 돌아가지 말고 지상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즉석에서 써준 한시.(천상의 선녀가 잠시 내려와 노닐고 있나니/동산의 새들도 자취를 감추고 꽃마져 부끄러워하는구나/그들의 향한 내마음을 한편의 시로 보내니/제발 하늘로 돌아가지 말고 지상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Q 한자를 중학교부터 썼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한자와 친해지게 됐나.

옛날에는 영화 포스터에 주로 제목들이 한자로 쓰였었다. 그러다 보니 국민학생인 내 눈에는 한자들조차도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한문을 배우게 됐고 삼국지는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대략 2천 자 이상은 거뜬히 알게 됐던 것 같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됐다.

중국 송나라 말기에 황견(黃堅)이 주()나라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아 엮은 책 고문진보와 중국 명나라 말기에 홍자성(洪自誠)이 지은 어록집인데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도교를 가미하여 처세법을 가르친 채근담을 읽게 됐다. 한자는 물론 좋은 문장은 노트에 빼곡히 적기도 했다.

편식이 심했던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한자와 영화는 한 번만 봐도 기억에 오롯이 남았으니까. 특히 학창시절에 봤던 이백이나 두보 시는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유교 고전인 사서논어와 맹자, 대학, 중용을 보고, 중국사 개설서인 중국통사를 읽었다. 중국통사만 가지고 24시간 직접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강의가 중국이란 나라를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고전을 상당히 즐겨 읽었던 나의 학창시절, 나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고전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석유재벌 존 록펠러가 세운 시카고 대학은 설립 초기 삼류대학교였다. 하지만 1929년 시카고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슨은 약 100여 권의 고전을 읽지 않으면 학생들을 졸업시키지 않았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문제아들의 사고능력에 변화가 생기며 그들의 진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고전 읽기로 시카고대학은 삼류대학에서 명문대학으로 진일보할 수 있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 당시 모르는 글이 나오면 옥편을 찾아가며 한문으로 필사하기도 했다. 어느날 이 모습을 본 대만 유학생이 탄복을 하며 외국인이 이렇게 한시를 많이 알고 중국 역사를 많이 아는 사람은 내 생전 본 적이 없다. 여기 있지 말고 중국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해 줬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친구 말을 듣고 중국으로 떠나게 됐다.

태극마크를 달고 해외에서 제품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
태극마크를 달고 해외에서 제품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

Q 당시는 중국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중국으로 들어갔나?

사연이 많다. 그 친구 말대로 프랑스에 몇 년 있다 중국을 가기 위해 절차를 알아보니 그야말로 장벽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편지쓰기였는데 아마도 50통 이상은 보냈던 것 같다.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모르니 일단 신문을 구했고 기사에서 조선족이나 중국인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그 사람들의 주소를 수소문해서 제발 나를 초청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물론 중국 정부에도 숱하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실망을 하고 있던 찰나, 우연히 조선족 출신을 만나게 됐고 그가 중국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나는 그사람 말대로 홍콩으로 가서 불법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한두 달 정도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한국으로 나왔다. 그때가 20대 끝자락이었다. 그후 중국 북경으로 정식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며 훗날 동양학의 정수라고 하는 명리학도 공부하게 됐다. 내가 보는 명리학은 남의 길흉화복(吉凶禍福)보다 자기반성 내지는 자기 수양의 학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한국으로 나와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와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딸도 하나 낳았다. 만약 아내의 사고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는 해외 어느 곳에서 여행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Q 아내의 사고였다면 어떤 사고를 말하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얘기해줄 수 있나?

긴 시간이 지났고 또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말해도 괜찮다. 사고 전날 나는 중장비수출 때문에 부산으로 출장을 간 상태였고, 마침 술을 한잔했던 상태라 차 안에서 자고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나를 찾았고, 집사람이 비행기를 타려고 새벽 출근길에 그만 아스콘 운반 덤프트럭이 뒤에서 받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고시간은 새벽 510. 더군다나 우리 집사람이 가해자로 몰려 있었고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우리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고 내게는 어리디어린 딸아이만 덩그러니 남겨진 상태였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바로 그럴 때 나오는 것 같다. 망연자실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할머니 품에 안긴 아이를 두고 새벽 사고 현장을 50번 이상은 다녀오곤 했다.

그렇게 나는 슬플 겨를도 없이 아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지리한 법정 싸움을 했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40개월 만에 결국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

가끔 부부동반으로 술을 마실 때가 있다. 우스개 소리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묻어둔 우리 집사람과 나만의 고독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말해 친구 부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혼자 남은 딸은 철이 빨리 들었다. 어린 딸이 뭘 안다고 내게 재혼을 권했다. 아이를 바라보며 세상 모든 사람은 엄마를 잊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마저 잊으면 안 되지 않나. 왜냐하면 너처럼 귀한 선물을 아빠에게 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 그리고 만약에 아빠가 재혼을 한다면 너희 엄마를 잊어야 한다. 그것은 재혼자에 대한 배려다.

마리 로랑생의 시에도 있지 않니. 버려지고 쫓겨난 여자보다, 아니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고. 그런데 너처럼 귀한 선물을 준 너희 엄마를 아빠는 잊혀진 여자로 만들 수는 없단다.”

그 내면에는 엄마 없는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할머니와 여동생들이 잘 챙겨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가족은 나의 힘이다.

베트남 하노이 성당 앞에서
베트남 하노이 성당 앞에서

Q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결혼할 때는 꼭 사랑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해라. 그리고 지나치게 속물적으로 살지 마라.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독서, 외국어 공부, 해외여행을 많이 해라. 중국에서 최고 부자 중의 하나가 알리바바 마윈이다. 그는 항주사범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와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만약 마윈이 영어를 못 했더라면 오늘의 마윈이 존재했을까.

소프트뱅크 그룹 손마사요시(손정의) 회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경제학 학사를 마쳤다. 만약 그가 영어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그가 존재했을까.

또 위에서도 말했듯이 시카고대학도 독서가 학교를 바로 세운 예다. “번역기가 있는데 굳이 외국어를 해야 하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남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데 혼자서 번역기를 돌리고 있을까. 또 아무리 번역기가 뛰어난들 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인도 인구가 약 14억이다. 그 나라의 잘 사는 1억은 대부분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꼭 영어만 잘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외국어 하나쯤은 공부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아, 책을 읽다 보면 누구 하나쯤은 멘토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작가여도 좋고, 사상이어도 좋고, 정신세계라 해도 좋다. 그러니 시간이 되거들랑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