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면조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대사건 ‘서편제의 등장’

19세기 말 송흥록제는 동편제로, 박유전제는 서편제로 구분되다

【기획취재】 3대 읍성과 연계된 지역유형의 판소리문화와의 결합②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재 마을에 위치한 판소리성지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재 마을에 위치한 판소리성지

본 취재는 순천 낙안읍성과 동편제, 고창읍성과 서편제, 그리고 서산 해미읍성과 중고제 판소리문화와의 결합을 통해 상호 시너지 창출.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는 기획취재이다. 본지는 본 취재를 통해 해당 지자체간 행정적 공조 및 시민들이 세계유산에 대한 인식과 민간 단위의 전략적 제휴와 협력을 모색한다. - 편집자 주


서편제보성소리전수관
서편제보성소리전수관

서편제의 창시, 보성 판소리 성지를 가다

19세기 중반 송흥록을 법제로 한 소리제가 완성된 후 19세기 말에 이르러 송흥록의 소리제와 매우 다른 박유전의 소리제가 보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소리제는 송흥록 소리제와 달리 계면조 중심에 화려한 기교를 표현하는 특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기존의 송흥록제와 새로운 박유전제가 서로 대비되면서 이 두 소리제의 거점인 남원과 보성을 지리적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흥록제가 동편제, 박유전제가 서편제로 구분되었고, 이는 판소리의 지역적 유파임과 동시에 시대적 변모 과정이기도 하다. , 우조 중심의 판소리가 계면조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서편제의 등장인 것이다.

보성 판소리 성지는 조선시대 명창이자 서편제 창시자인 강산 박유전 명창을 비롯해 정재근·정응민·조상현 선생 등 서편제 계보를 이은 명창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자가 찾아 간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재 마을. 보성 읍내에서 차로 30여분을 가다보면, 세칭 여우재라는 고개가 나온다. 고개 마루에 서면, 멀리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차를 만드는 보성 다원으로 유명해진 이 여우재를 새큼한 차 향기를 맡으면서 구비 구비 돌아서 넘어가면, 박유전 선생 기념비, 정응민 선생 생가, 득음정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서는 서편제를 동편제에 비교해 계면조 중심이어서 연미부화軟美浮華하며 구절 끝마침을 좀 끌어서 꽁지가 붙어 다니는것으로 묘사했다. 담담하고 채소적菜蔬的인 동편제와 달리 서편제는 끈끈한 듯 육미적肉味的이며, ‘천봉월출격千峰月出格의 동편제와 비교해 서편제는 만수화란격萬樹花爛格이라 표현했다.

이런 표현들이 보여 주듯이 서편제는 부드럽고 세련된 기교와 섬세한 감성을 화려하게 담는 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동편제가 선이 굵고 씩씩하며 담백한 소리제인 것과 비교된다.

정응민 선생 유품 전시회
정응민 선생 유품 전시회

박유전의 소리, 이날치와 정재근으로 갈라져

박유전은 1834년 전라남도 보성군 강산면 출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망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박유전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무과벼슬까지 제수 받았고 국창의 칭호를 얻었는데, 특히 적벽가를 잘하였다고 한다. 박유전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국창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임오군란과 함께 청나라에게 연금이 된 대원군의 실각으로 말미암아, 박유전은 민비 일파의 보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나주에서 판소리를 하던 정재근(18531914.정응민 백부)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무르면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정재근은 박유전으로부터 [심청가][춘향가][적벽가][수궁가]를 배운다. 3~4년 후, 대원군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자 박유전은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때 정재근은 일곱 살 된 조카 정응민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한다. 서편제 창시자가 박유전이라면 오늘 날 보성소리를 있게 한 명창이 바로 조카 정응민이다.

계보상으로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와 정재근에게 이어졌고, 이날치의 소리는 김채만을 거쳐서 공창식·박동실·성원목 등에게 전해졌다. 이들의 제자가 김소희, 한애순, 한승호 등 명창들이다. 정재근의 소리는 정응민에게 전해졌고, 이후 정권진·성우향·안채봉·성창순 등이었다. 이날치·정재근 계통과 별도로 정창업 계통의 소리가 전해졌으며, 이는 김창환을 거쳐서 김봉이·김봉학·임방울·오수암·조몽실·강남중 등이 계보를 이었다. 한편 이날치와 정창업에게 소리를 배운 정정렬의 소리는 김여란을 거쳐 박초선, 최승희에게 이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동편제와 서편제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전승되지 않았으며, 동편제 계통 소리와 서편제 계통 소리가 절충되거나, 여러 명창 소리제의 장점을 모아 새로 자신의 소리제를 만들거나, 한 명창이 동편제와 서편제 소리를 모두 보유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따라서 명창을 중심으로 동편제나 서편제로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박유전 선생 기념비
박유전 선생 기념비

보성소리의 살아있는 신화 송계 정응민

정응민은 강산제 보성소리의 큰 스승이다. 송계 정응민은 강산제 보성소리의 계승자이면서 유일한 교육자였다. 많은 판소리 학자들은 송계 정응민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고제(故制) 판소리는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을거라고 입을 모은다. 정응민은 보성소리의 살아 있는 신화이며 판소리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나이는 스무살 무렵, 고향에 내려온 정응민은 한동안 향리에 묻혀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게 된다. 정응민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정응민은 당대를 주름잡던 명창들에 비해서 목구성이 뛰어난 명창도 아니었고, 중앙무대에서 활동했다는 이렇다할 기록도 별로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를 찾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귀향을 한 정응민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강재 마을에서 소리 세계와 한동안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응민 선생 기념비와 생가
정응민 선생 기념비와 생가

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온다. 명창 정광수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박춘성이라는 젊은이는 정응민에게서 소리 수업 받기를 간청했고, 정응민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박춘성은 보성 득량 출신으로 협률사 공연을 보고 소리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박춘성은 목포와 광주의 유명하다는 소리 선생들을 찾아 다니던 중, 우연히 명창 정광수를 만나게 되었고, 정광수는 그에게 정응민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박춘성은 스승인 정응민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소리 공부에 전념했는데, 6년여의 교습을 받은 후, 전주에서 열린 대사습에 나가 영예의 장원을 차지하게 되면서 소릿꾼으로써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와 함께, 박춘성을 통해 정응민의 독특한 보성소리는 비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박춘성의 소리가 이렇게 인정받게 되자, 정응민의 보성소리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소릿꾼들이 보성 회천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당대 명창이고 창극에도 뛰어났던 김연수를 비롯해서 쑥대머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임방울, 그리고 현재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정광수에 이르기까지 강산제 보성소리의 심오한 세계에 빠져 극찬을 하기에 이른다.

조용했던 회천면 영천리 도강재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소리꾼들로 인해 마을을 들끓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명창들과 명창 지망생들이 정응민에게서 소리공부를 했지만, 보성소리를 제대로 공부한 제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날, 정응민의 보성소리를 잇고 있는 제자들은 먼저 박춘성과 성우향, 그리고 조상현과 성창순 씨를 꼽을 수 있다.

득음문
득음문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명창들이 창극의 영향으로 상업화에 빠지면서 판소리 본래의 멋을 잃어가고 있을때, 정응민은 향리에 묻혀 판소리 고제를 지켜왔고, 또 제자들에게 온전히 전수 시켰다. 뛰어난 명창은 아니었지만, 지조를 지닌 판소리 교육자로써, 혹은 탁월한 음악 이론가로써, 소리의 멋과 맛을 후학들에게 완벽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즈음 보성소리는 우리 시대의 최고봉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고창읍성(모양성) 전경(드론)
고창읍성(모양성) 전경(드론)

동학농민운동의 함성이 살아 있는 무장읍성고창읍성

한국이 낳은 동양의 세익스피어 동리 신재효

판소리의 이론과 미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고창의 신재효(1812~1884). 판소리에 관한 이론적 유산을 남겨놓은 이가 바로 신재효이며, 그는 서민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요, 연출가이며,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기법으로 판소리 사설(타령)의 창작과 집대성으로 필생의 대업을 이루었다.

선생의 자는 백원(百源)이요 아호는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은 지방관청의 서울 일을 대신 해주던 경주인 노릇을 하다가 고창으로 내려와서 관약방을 했던 신광흡의 아들로 순조 11(1812)에 태어나 고종 21(1884)에 세상을 떠났다.

신재효는 판소리의 양대 유파인 동편제와 서편제의 명창들에게 두루 영향을 끼쳤다다. 동편제에 속했던 박만순, 김세종, 전해종, 김창록, 진채선, 허금파 등과 서편제에 속했던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등의 명창들은 직접 그의 이론적인 지도를 받거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리선생은 학문과 음률, 가곡, 창악, 속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지도하였고 대표적인 공적으로 옛날부터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판소리를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흥보가), 가루지기타령(변강쇠가), 적벽가, 토끼타령(수궁가)등 판소리 여섯 마당으로 집대성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1940년 후반 가람 이병기 선생은 동리선생은 한국이 낳은 동양의 세익스피어라고 극찬했다.

현재 가사문학의 산실인 동리정사는 소실되고 그 일부인 사랑채만이 남아있으며 1979년 주요민속자료 39호로 지정되었고 동리국악당은 동리선생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군민의 뜻을 모아 1990년 완공했다.

고창 무창읍성 전경
고창 무창읍성 전경

동리 신재효, 판소리 여섯마당 집대성하다

판소리의 이론과 미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신재효의 선대는 서울에서 살았으나 부친 신광흡은 경주인으로 있다 고창으로 내려와 향리가 되었고 관약방을 운영했다. 신광흡과 어머니인 경주김씨 사이 13녀 중 외아들로 1812116일 태어났다. 고창에서 아전을 하다 말년에 관속, 광대, 기생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판소리, , 기예는 익숙했다. 물려받은 유산을 불려 천석지기가 된 후.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본래에 있던 판소리 열두마당 중 판소리 여섯마당인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의 사설을 정리하고 개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오섬가, 광대가, 허두가, 치산가, 성조가, 단잡가, 도리화가, 권유가, 방아타령, 명당축원, 호남가, 구구가 등 단가와 시가를 창작하였다.

판소리 이론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른새 등 4대 법례를 만들어서 역대 명창들의 특색을 비유 방식으로 평가하였으며, 이론도 판소리 향유자들의 취향에 대응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틀을 정립하였다.

신재효 문하에는 순창출신 김세종, 정읍출신 박만순, 서편제 대표적 소리꾼인 담양출신 이날치, 함평출신 정창업, 부안출신 전해종, 진채선 등을 배출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고창은 판소리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동편제의 비조 송흥록과 서편제의 비조 박유전은 무격 출신의 소리꾼인데 반해,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 판소리를 집대성한 인물이자 뛰어난 판소리 이론가였으며 그를 통해 근대 판소리는 새롭게 거듭났다.

신재효는 구전(口傳) 판소리 사설을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했다. 나아가 개작과 판의 분화, 수많은 창작을 통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경계를 그었다. 소리꾼들을 모아 교육했으며,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최초의 여류 명창을 배출해 냄으로써 19세기 후반의 격변기에 고창이 판소리 지각변동의 핵으로 작용하게 하였다. 본래 서민예술이었던 판소리의 지위를 일약 고급예술로 끌어올렸고, 국창(國唱)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이날치·박만순·김세종·정창업·김창록·장자백·김찬업·김토산 등 동서편 판소리 거장들을 길러냄으로써 '고창 신재효 문하를 거치지 않고는 어전광대는 될 수 없다'는 말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고창은 동편제의 새로운 거점이면서 동시에 동서편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신재효 생가
신재효 생가

판소리와 동학 판소리는 민중의 소리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의 쓰라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30년 후 다시 병자호란을 겪게 되니 민족적 시련은 그 극에 달했다. 이 양란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도 막대했거니와 서서히 자아에 대한 각성도 움터 관료적 지배층인 양반계급의 무력함이 폭로되었고 또한 자기 계급 내에서도 비판의식이 대두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

여기에 19세기 동학농민 항쟁과 봉기는 당시 민중들의 자유를 향한 꿈틀거림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사례들이다. 그 꿈틀거림은 예술의 분야에서 민중 예술의 형태로 나타났다.

판소리가 동학의 함성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판소리가 온몸을 사용하여 소리를 통해 인간의 신명을 풀어냈다는 점일 것이다. 동학과 판소리는 생성하고 변화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를 담고 있다. 이 두 운동은 분명 인간다움을 갈망하던 사람들의 자유를 향한 강렬한 몸짓이었다.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서 의견들이 분분할 따름이다. 그러나 사회현상의 변화는 예술을 탄생시키며 키운다.

판소리에는 그 당시 민중들의 한과 저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춘향가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판소리 작품 중 하나이다. 다음은 춘향가못 보것네대목의 가사이다.

사진6 : 동리 신재효
전봉준 생가터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 사또가 모지도다. 어린 것이 쪼금 잘못을 허였다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집장사령놈을 눈 익혀 두었다 사문 밖을 나가면 급살(急煞)을 내리라.”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판소리),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비교적 현대적인 문체로 각색된 이 대목은 남원에 부임한 신임 사또가 자신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에게 가혹한 횡포를 가하는 모습을 그린 대목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그림은 모진 폭정에 당하는 춘향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면서 그 폭정을 가하는 탐욕스러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민중들의 비난과 분노가 보인다.

사실 [춘향가]를 비롯한 많은 판소리 작품에서 크고 작은 담론에 대한 저항 의식과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해학적이고 직설적인 비판 의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종모법(從母法)에 의해 기생의 신분을 가지게 되는 춘향이 사또의 수청을 거절한다는 설정은 권력에 대한 저항도 보통 저항이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동학이 창도되었던 1860년 이후 [춘향가]에서 보이는 민중의 분노 표출 양상이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이고, 18941월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동학 농민군이 고부관아(古阜官衙)를 습격했을 당시 농민군들이 춘향전중의 사또를 비판하는 대목을 부르면서 쳐들어갔다고 한다.

고창지역에서 살았던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판소리 체계를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6마당으로 세우면서 스스로 고창 지역 농민들의 분위기와 사회적인 동요의 흐름을 감지해 판소리 가사에 반영했다는 가능성도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다.

판소리의 등장인물은 뛰어난 사람도 완벽하지 않고 악한 인간도 철저하게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둘 다 풍자, 희롱 및 조롱의 대상이 된다. 모두가 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더 잘난 놈, 더 못난 놈도 없다. 이것은 평등주의이며 인간 대상에 대한 정감(情感) 어린 시각이기도 하다. 너도 하늘이고 나도 하늘이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하늘이다.

또 다른 면에서 판소리에서는 여러 가지 몸에 대한 금기에 도전하는 부분이 발견된다. 신재효본 변강쇠가에서는 성기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게 보인다. 몸의 발견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다. 흥보가’, ‘춘향가에서는 식욕과 색욕 같은 인간의 본연적 욕망을 표출한다. 특히 춘향가에서는 애정과 정절에 대한 주체화가 보이며, 이는 지배 이념에 저항한다. 판소리에서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성리학적 유교의 질서에 구애 받지 않는다. 행동거지에 대한 금기나, 고원한 대상에 대한 외경도 담지 않는다.

고창판소리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한 고창읍성과 무장읍성의 역사

고창읍성은 세종 32년에 축성을 시작, 문종을 거쳐 단종(1453) 원년에 완공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축성됐다. 평온한 고장에 이렇게 견고한 성을 쌓을 정도였으니 서해로 올라와 약탈을 자행하던 왜구의 분탕질을 짐작할 만했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진 것을 1976년부터 정비해 14개 동을 복원했다.

고창읍성 안에는 원래 민가가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동헌 자리에 초등학교를 지었고 고창여중·고가 들어서 약간의 사람들이 살기도 했다.

고창읍성 축조에는 전라우도인 고창, 무장, 흥덕, 옥구(군산), 용안(익산), 김제, 정읍, 고부, 태인, 영광, 장성, 진원(장성), 함평, 심지어는 제주에서도 왔으며 전라좌도인 용담(진안), 임실, 순창, 담양, 능성(화순) 등 무려 19개 군현이 참여해 3년여 공사 끝에 완성했다. 표석은 세월이 오래되고 훼손돼 잘 안 보여 각종 문헌과 현장조사를 참고해 1997년 고을 표석을 만들어 입구에 세웠다.

또 고창에는 고창읍성과 함께 무장면에 무장읍성이 있다. 조선시대인 1417(태종 17) 왜구의 침입에 대비 성을 쌓고 관아를 뒀는데 원래 무송과 장사라는 두 고을의 첫 자를 떼어 무장읍성이라 했다. 고창읍성과 마찬가지로 전라도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여 명이 동원돼 4개월 만에 축성했다. 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한 동학농민군이 고창을 거쳐 3일 동안 머물며 휴식을 취한 곳이다.

전봉준 생가터
전봉준 생가터

고창읍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조했지만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당시 전투기록은 없다. 당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이 첫 전투기록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읍성에는 관군과 일본군이 주둔했으며 동학농민군은 기습에 성공해 이들 일본군을 섬멸했고,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호남창의맹소라는 의병군을 조직한 장성의 기삼연의 부대가 고창읍성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섬멸하고 무기까지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지은 성이지만 훗날 이곳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8942월 고부 농민 봉기로 시작된 동학 운동에는 대장이었던 전봉준 이하 김개남, 손화중, 홍계관 등의 두령들이 있었다. 이 중 홍계관이 광대 부대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동학은 신분 평등을 우선시했다. 이에 노비들과 역졸(驛卒), 무부(巫夫), 백정 등 천대받고 고통 당했던 천민들이 특히 이 동학 운동에 많이 들어와 새 세상을 이루고자 했다. 이 중 창우(倡優), 재인(才人), 무부(巫夫) 등으로 기록된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인 세습 무당 집안의 남자들이 이들 동학군들의 실제적인 주요한 전투 부대원들이었다.

처음에 김개남은 도내의 창우(倡優재인(才人) 천여 명으로 일군(一軍)을 만들어 그들을 두터이 예우해서 그들의 사력(死力)을 얻음을 도모하였다...처음에 손화중은 도내의 재인(才人)을 뽑아 1()를 조직하고 홍낙관으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했다. 홍낙관은 고창의 재인으로서 손화중에 속하여 그 부하 수천 명이 민첩하고 정예병이었으므로 손화중이 비록 전봉준, 김개남과 정족지세(鼎足之勢)에 있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손화중의 무리가 최강이었다.” - 황현, 오하기문

그 많던 광대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동학 운동에서 선화(仙化)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그들의 고향을 떠났다. 한편, 동학 운동이 한창이던 18946월 정부는 갑오경장을 단행해 신분 제도를 철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