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56

여름 캠프 사진
여름 캠프 사진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다]를 읽고 책읽아웃이라는 팟캐스트를 알게 되었다. 책읽아웃을 들으며 김원영 변호사를 알게 되었고, 그의 저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희망 대신 욕망]을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20대 초반에 봉사활동을 하던 장애인 시설이 문득문득 생각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몇 가지 일들로 소환된 아련한 기억.

대학에 입학한지 몇 달 지나지 않은, 새내기 시절의 여름방학이었다.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발 빠른 대학동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뒤 취업을 하자면 나 또한 봉사활동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순전히 필요에 의해 방문하게 된 그 장애인 시설은 의외의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경주 토박이인 나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낯설고 고립된 곳.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넒은 마당이 있었고 입구 옆에 사무실, 오른쪽에 숙소와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 2동이 있었다. 말이 좋아 건물이지, 사실은 오래된 축사를 개조한 곳에 지체 및 발달장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낯선 장소와 생경한 분위기가 퍽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명색이 학생간호사라는 사람이 멍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둘러 분위기 파악을 끝낸 나는 곧 팔을 걷어 부치고 할 일을 찾았다. 첫 날, 낯선 사람들 틈에서 맨손으로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난생 처음 장애인과 상호작용을 하고, 그리 청결하지 않은 장소에서 전에 없던 육체노동을 하는 것에 특별한 감흥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나브로 그 장소와 사람들에 빠져들었다. 여러모로 넉넉지 않은 그 곳에 내가 작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 좋았다. 그 곳에 거주하거나 낮 동안 생활하는 장애인들을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단골 점심 메뉴였던 라면을 큰 솥에 끓이고, 그걸 나눠주고 먹여주고, 옆에서 함께 먹는 것이 즐거웠다.

봉사시간을 채운 대부분의 동기들이 발길을 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방학동안 거의 매일같이 그 곳에 들렀다. 30분을 걷고 그 만큼의 시간동안 버스를 타고도 쉽게 닿지 않는 외진 곳으로, 방학 이후에도 주말마다 꾸준히 방문하였다.

시설에는 나와 같은 학생 봉사자가 많이 드나들었다. 봉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일종의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봉사를 지속하는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시설 운영자는 나와 또 다른 한 친구에게 준간사라는 직책과 명함을 주었다. 허울뿐인 직책이라 해도 난생 처음 소유한 명함을 보니 애정이 퐁퐁 솟아나고 기관에 모종의 기여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짙어졌다.

재정적으로 열악해 축사를 개조해 만든 시설은 환경적으로도 썩 좋지 않았다. 실내에는 흙과 모래, 나뭇잎, 닭털이 나뒹굴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마당에 뛰어나갔다가 씻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오는 자폐 및 지적장애인들이 이유였다.

바퀴벌레도 많았다. 날짜가 며칠 지난 치킨너겟이 후원물품으로 들어온 날이었다. 며칠 지난 날짜가 걸리긴 했지만 그것조차 고마운 형편이라 기꺼이 간사언니와 전기 후라이팬을 꺼냈다. 주방 바닥에 앉아 팬이 달궈지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전기선을 꽂은 부위에서 바퀴벌레 떼가 쏟아져 나왔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기이한 광경에 비명이 나왔다. 한바탕 소란 후 우리는 다시 묵묵히 팬에 기름을 두르고 치킨너겟을 구웠다. 안타깝지만,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 앞에서 청결은 사치일 뿐이었다.

침을 흘리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사람들 틈에서 식사 보조만 하던 나는, 며칠 후 같이 먹자는 권유에 못 이긴 척 그들 사이에서 함께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그 곳에 있으려면 배가 고팠으니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거니와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식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작 놀란 건 나의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은 음식을 먹다가 작은 이물만 나와도 구역질을 하고 숟가락을 놓던 내가 그 곳에서 음식을 먹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곳에서 강해진 비위는 병원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독교 관련 시설이었던 그 곳에서 일요일이면 장애인 친구들 틈에서 기도를 하고 찬송가와 율동을 배웠다. 내가 아는 몇몇 찬송가는 전부 그 곳에서 알게 된 것이다. 여름에는 시설의 장애인, 특수학교에 다니는 외부 장애인들과 함께 기도원으로 캠프를 갔다. 종교가 없는 내가 기도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릴 곳이 되었다.

시설에는 뇌성마비가 심해 꼼짝도 못하던, 여름이면 접힌 팔과 다리가 짓무르던 또래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입에 막대를 물고 키보드를 눌러 컴퓨터를 사용했다. 그와 가끔 채팅을 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가 자해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칼로 손목을 그었고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부터 방문이 조심스러워졌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해야 할 일이 많아진 나는 여러 가지 사정이 더해져 그 곳에 방문하는 일이 점점 뜸해졌다.

그러는 사이 시설에는 운영과 관련해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고, 외곽에 건물을 지어 이사도 했다. 일부 장애인들이 나가고 새로 들어왔으며, 나는 내 차를 운전해 가끔 방문하는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결국 그 곳은 내가 졸업한 모교 같은 곳이 되었다.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이 깃든 아련한 장소 말이다.

한 시절을 함께 하던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여전히 봉사자가 많이 다녀가는 시설임에는 변함없지만, 불행히도 내가 알던 장애인 친구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 모교들처럼 기관 자체는 여전히 굳건하지만 그 속에 있는 관계자는 모두 변한 것 같다.

십 수 년 전 내가 알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세월을 거스르는 추억에 쓸쓸함이 더해진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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