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킴만 알려주는 비밀번호

현금지급기는 촌스런 나에게 항상 거리가 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나도 세월 따라 약게 산다고 하지만 마음뿐이지 뭐하나 제대로 해 나가는 것이 없다. 언젠가는 막내딸이 밤에 돈을 쓰다가 모자라니까 현금 지급기를 찾아서 돈을 빼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막내야 세상은 참 좋다. 그렇지~ 그 딱지 하나가 뭐기에 돈이 나온다니...”

“엄마도 현금 카드 만들어 보시겠어요?”

“통장 번호두 못 외워서 맨 날 직원한테 물어 보는 디 싫어.”

몇 년 전 일이다. 큰맘 먹고 갖고 싶어 하던 현금 카드를 만들었다. 직장에서 일하는데 현금 카드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사용하는 방법을 현금지급기가 없는데도 있는 것으로 가상하고 막내한테 집에서 배웠다. 현금지급기와 내가 첫 거래가 있었던 날은 맘껏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은행에 가서 돈 찾을 때 이름과 도장이 없어도 된다. 머리 하나만 잘 굴리면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만화에 나오는 요술쟁이처럼 카드를 넣고 꾹꾹 손가락으로 누르면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카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딱지 하나에 불과하다. 딱지를 넣고 아라비아 숫자를 누르면 돈이 나오니까 참 신기하다.

통장을 넣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오류라고 빈 영수증만 나온다. 내가 비밀번호를 잘못 찍었나 하고 다시 했다. 세 번째를 누르니까 이젠 오류라고 하면서 카드를 다시 만들라고 한다. 그런데 카드는 안 나오고 통장이 나온다.

“아차!” ‘내가 결국에 일을 제대로 저질렀구나. 카드를 넣은 것이 아니라 통장을 넣었던 것이다. 이젠 통장도 나오지가 않는다. 두 팔 벌려 현금지급기를 막아서서 아무도 못 오게 막았다. 겁이 났다. 내가 지급기 앞을 떠나면 누군가 통장을 꺼내 갈 것만 같았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이 “세 번 오류나면 다시 만드는 것이에요. 카드를 넣어야지 통장을 넣었네요”하면서 카드를 다시 만들라고 통장을 꺼내준다.

“옛날 방식대로 그냥 살아갈 걸 괜히 카드를 만들어서 아가씨만 귀찮게 하네. 카드는 집에 있어.”

담당 직원은 위로에 말도 없이 픽 웃고 만다. 나는 늙은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속으로 “너도 나처럼 늙어봐라”고 말을 삼킨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카드는 써 보지도 못하고 카드는 내 손을 떠났다.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카드를 다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안달이 났다. 남들처럼 큰돈이 오고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고민하다 다시 만들었다. 먼저 경험을 살려서 조심스럽게 현금 지급기 앞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다가가서 서 있다.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고 수첩에 적어 깊숙이 넣어둔 비밀번호를 찾아 읽어본다.

현금지급기에 카드를 넣는데 물레방아에서 물 떨어지듯 철썩 잘도 들어간다. 얼굴도 안 보이는 미스킴이 마중 나와 얼마를 빼 갈 것인가 액수와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한다.

그려! 못 외웠던 비밀번호를 오늘은 확실히 할 것이다. 먼저 오류 났던 것은 내 잘못이었다. 기계 속에 들어앉은 미스 킴은 늙은이한테 사기를 안치겠지. 요즘은 믿을 것이 있어야지.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는 비밀번호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미스킴에게 신호를 보냈다.

미스 킴은 빨리 알아차리고 현금을 다다닥 내보낸다. 첫 번째 거래에 골인을 했다. 지급기 안에 들어앉은 미스 킴이 고맙다. 현금을 꺼내어 마치 무슨 행운을 거머쥔 것처럼 내가 나를 칭찬한다. 기숙이 장하다고...

누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별 것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요즘 세상은 정보화 시대로 빨리 돌아가고 있다. 늙고 짧은 실력으로 따라가려니까 머리만 복잡하다. 스마트폰 하나만 사용해도 어지간한 업무 처리는 문제없다. 콩이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으면 일 년이 넘어야 제 맛이 나듯이 옹기그릇에 담은 된장처럼 찬찬히 느림의 미학처럼 살면 안 되는 것인가.

또 차를 타고 후다닥 지나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을 제대로 못 보지만 걸어서 가다보면 현미경으로 보듯이 온갖 만물을 상세하게 감상하고 느끼면서 간다. 걸어 다니는 것도 느림의 미학 한 토막인 것을.

김기숙/ 수필가, 수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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