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 그리고 플로리스트에서 바리스타까지 커피 인생을 그리다

서산 최초 커피학원을 개원한 ‘김종훈바리스타커피학원’ 김종훈 원장
서산 최초 커피학원을 개원한 ‘김종훈바리스타커피학원’ 김종훈 원장

커피 속에는 무구한 역사의 강이 흐르고 있다. 세계를 움직였던 수많은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74편의 단편 소설을 남긴 작가 발자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하루에도 60잔의 커피를 마시며 집필에 혼을 담기도 했는데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전쟁터의 기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기억은 기습하듯 살아난다. 작중 인물은 즉시 떠오르고 원고지는 잉크로 덮인다는 말로 커피의 놀라운 위대함을 고백했다.

아아! 커피의 기막힌 맛이여! 그건 천 번의 키스보다 멋지고, 마스카트의 술보다 달콤하다.

혼례식은 못 올릴망정, 바깥출입은 못 할망정, 커피만은 끊을 수가 없구나라고 했던 독일의 작곡가 바흐도 빠뜨릴 수 없는 커피 마니아다. 그는 커피 찬양을 아리아의 한 대목 속에 커피 칸타타라는 내용으로 실을 정도였다.

커피를 사랑한 역사 속 두 인물을 떠올리자니 문득 오버랩되는 한 남자가 있다. 플로리스트에서 바리스타 하나를 더 추가하여 지역 문화를 새롭게 만든 서산 최초 바리스타학원을 연 김종훈 원장이다.

커피 문화가 일상화되면서 사무실이나 집에서도 나만의 커피를 내려 마시는 커피 마니아들이 새벽 4시부터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 장사진을 쳤던 기막힌 일들은 지금까지 지역에 회자되고 있다.

서산시대는 봄의 왈츠가 한창 시작될 무렵, 김종훈 바리스타를 만나 진한 커피 향에 담긴 그의 인생스토리를 담아 봤다.

플로리스트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김종훈 원장
플로리스트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김종훈 원장
Q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은 왠지 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 같다. 혹시 떠오르는 기억 중에 향에 대한 추억이 있는지?

향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려면 어린 시절로 회귀해야 한다. 내 고향은 유난히 아름드리 해송이 기막히고 꽃내음 솔솔 피어오르는 태안군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남면 몽산리 동산이란 작은 마을에서 화훼업을 하시는 부모님 아래 2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꽃 농사를 주 직업으로 삼으신 터라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대부분을 부모님 일손 도와 드리며 하루를 보냈다. 때로는 꽃향기에 취해 종일 일해도 힘든 줄 모르고 일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노동으로 하루를 마감하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때로는 털썩 주저앉아 키 작은 내 코에 아버지가 키운 꽃송이를 끌어다 킁킁 향기를 맡기도 했다.

아무리 냄새 좋은 꽃이라도 어린 내 눈길을 마냥 붙잡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나는 어렸고 어린 마음에 농사에 지친 나를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다. 그것도 위로 누나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보니 장남인 내가 차지한 농사일은 가히 만만치 않았다. ‘고등학교만은 무조건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리라결심했던 배경에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가 부싯돌 역할을 했다.

늘 바쁘단 핑계로 자주 놀아주지 못해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다는 김 원장
늘 바쁘단 핑계로 자주 놀아주지 못해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다는 김 원장
Q 그 시절에는 대부분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아들보다 딸들이 일을 많이 했는데 의외다. 집을 떠나는 과정에서 부싯돌 역할을 했다면?

집을 떠나기로 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버지때문이었다. 당시 시골 마을에는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도 상당히 드물었는데 우리 집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오토바이가 있었다.

고요한 밤, 저 멀리서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나면 나는 그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버지는 약주를 드신 상태로 한 손에는 토끼같은 자식들에게 줄 양갱이 든 과장 봉지를 들고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몸에는 낮동안 화훼농사로 땀 흘린 냄새가 역하게 진동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비틀거리는 아버지 모습이 정말 싫었다.

더구나 불그스름한 얼굴로 3남매를 안방으로 불러 항상 글짓기를 시켰다. 그때가 얼마나 무섭고 하기 싫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장 연설, 그 속에는 항상 두 가지 당부 사항이 들어있었다. ‘남매의 돈독한 우정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사탕 한 봉지라도 반드시 사서 방문하라였다.

맞다. 다 맞는 말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 상황들이 싫었는지... 굳이 그 시절을 핑계 대라면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에 아버지의 말씀은 잔소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친구를 좋아하고 놀기를 즐긴 나는 원예과 대신 기계를 만지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성에는 맞지 않아 졸업만 기다렸고, 결국 친구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해병대를 지원하고, 군 생활 말년에는 대학입시를 준비하여 제대와 동시에 원예조경학과에 입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플로리스트가 됐다. 화훼농가였던 우리 집을 생각하면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운명이 아닐까 싶다.

‘꽃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플라워카페를 오픈했다.
‘꽃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플라워카페 '블루플레이스'를 오픈했다.
Q 정말 궁금하다. 꽃과 바리스타의 삶이 전혀 매칭되지 않는데 혹시 바리스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나?

물론이다. 대학교 졸업 후 2002년부터 꽃집에서 플로리스트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근무조건이 완전 지옥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가 돼야 퇴근할 수 있는 강행군이었다. 그것도 휴무라곤 겨우 한 달에 두 번. 정말 지독하게 근무를 했다.

퇴근 후에는 주 1회 꽃꽂이 개인 지도를 받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별이 유난히 빛나는 2~3. 힘들 법도 한데 배움이 무엇인지 그래도 꿈이 있고 젊음이 있어서인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플로리스트로 근무하면서 늘 꽃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그러던 차에 만난 것이 바리스타학원이었다. 당시 상담을 받기 위해 학원을 방문했다. 그때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내려 주었는데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카페라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카페라떼

세상에서 처음 보는, 예쁜 하트가 그려진 카페라떼! 그것을 처음 본 순간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 모양에 푹 빠져서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유난히 추웠던 2007년도 12일에 드디어 생애 처음으로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꿈을 꾸면 아무리 힘든 것도 행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그때서야 느꼈다. 플라워카페를 심중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그 이름 플라워카페. 우리 가족을 책임져주리라 생각하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Q 가장이고 또 창업이 만만치 않은 과제였을 텐데 대단한 결심을 하셨다. 그 당시 얘기를 해달라.

플라워카페 블루플레이스를 열기까지 정말 수십 번은 더 고민했다. 결국 그 답은 스스로에게서 찾았다. 그동안 플로리스트로 꾸준히 일한 경력을 살려 플라워카페 창업을 결정하게 됐을 때 의외로 집사람이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미안함을 뒤로하고 서산에서 창업을 했다.

바리스타라는 단어도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카페가 그다지 많지 않던 소도시에서 2009년도에 오픈을 하고 보니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많은 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찾아와 주셨다. 그런데 의외로 꽃보다는 바리스타에 관심을 보여 주셨는데 주로 커피가 제조되는 과정을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았다. 호기심에 가득한 한 분 한 분에게 커피 제조법을 조금씩 알려주었더니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다.

커피 애호가들이 많이 생겨나다 보니, 여기 저기서 바리스타 교육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리스타 교육의 문턱은 보기보다 상당히 높은 장벽이었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 것이 플라워샵 공간을 바리스타 교육장으로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은 뒤따랐다.

초창기에는 커피 도구를 들고 강좌할 곳을 직접 찾아다닌 김종훈 원장
초창기에는 커피 도구를 들고 강좌할 곳을 직접 찾아다닌 김종훈 원장
Q 그 당시만 해도 바리스타에 대해서 문외한인 분들이 많았는데 혹시 바리스타학원을 개원하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커피 도구를 들고 관공서 교육기관 및 문화강좌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질문하셨듯이 커피 시장 도입기에는 바리스타 교육의 필요성을 기관에서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계셨다. 그러다 보니 커피를 가르친다는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여기도 퇴짜, 저기도 퇴짜, 그래도 벽이 있는 곳이 곧 문이라는 생각으로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롯데마트 문화센터에서 커피 수업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는 커피머신이 없던 때였으므로 홈카페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핸드드립, 팬로스팅, 사이폰, 모카포트 등 커피 수업이 진행되면서 문의가 쇄도했다. 사실 홈카페도 재미있었지만, 수강생들은 커피머신으로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 등에도 관심을 보였고, 라떼아트에도 상당한 애정을 드러냈다.

또다시 희소식이 들려왔다. 서산문화복지센터가 개관하면서 바리스타 수업을 진행하자고 했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조리실 한 칸에 커피머신과 그라인더를 갖춰 주시기도 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바리스타 강좌에 수강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0명 선착순 마감에 첫 번째 등록하신 수강생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리스타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2기 모집에는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겨우 바리스타 강좌에 등록을 할 수 있을 만큼 그 열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했다. 서산에 바리스타학원이 없다 보니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다른 지역까지 이동하여 치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개원한 것이 김종훈 바리스타학원이었다. 좀 더 쾌적한 바리스타 교육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11월에 서산 최초 바리스타학원을 열었다.

서산에서 처음 문을 열게 된  ‘김종훈 바리스타학원’
서산에서 처음 문을 열게 된 ‘김종훈 바리스타학원’
Q 김종훈 바리스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뭔가?

만나면 인연이고, 관계는 노력이라는 모토 아래 학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커피 배우는 재미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커피가 등장했던 드라마를 보면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시대적 이슈를 통해 국내 커피 시장의 흐름과 변화를 되짚어 보기도 한다. 특히 세계 커피 트랜드 등의 새로운 이슈로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수강생들이 아주 좋아한다.

많은 사람이 커피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라고 말한다. 매해 카페 창업 인구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아이디어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필살기가 바로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고 한발 앞서가는 사람만이 커피산업에서 살아남는다고 본다.

커피에 재능만 있다면 미래도 걱정없다는 김종훈 대표
커피에 재능만 있다면 미래도 걱정없다는 김종훈 원장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종훈 바리스타는 커피+?’에서 물음표는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갸웃거리며 곰곰이 탁자 위에 물음표를 그려보자 그는 웃으며 본인의 재능이라고 했다.

일찍 커피 시장에 진입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지요. 후발주자들이 독특한 아이템으로 커피시장에 돌직구를 던지고 있습니다. 먼저 자리했다고 방심하지 말고 돌파구를 찾아야겠죠. 그것이 바로 재능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에 커피를 더한다면 시장이 아무리 열악하다고 해도 행복한 커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사르트르는 10년이 넘도록 카페에서 정해진 시간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집필을 했대요. 이처럼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려면 매일 찾는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분이 커피 한 잔에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로 커피향과 함께 어린 시절, 꽃을 보며 가만히 맡아보던 은은한 향기가 그리움이 되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앞에 놓인 커피잔은 이미 식어 있었고 그로부터도 한참 동안 남아 있는 커피잔을 들고 향을 맡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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