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해미읍성과 낙안읍성, 고창읍성에는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가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읍성은 조선초기 군사적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전국의 330개소의 행정구역 중 160개소에 읍성이 있었다. 그 중에는 2개 혹은 3개의 읍성이 있는 지역도 있어서 전체 읍성의 수는 190개소였다. 그 중에서 179개소는 석축성이다.

읍성(邑城)은 하나의 건축물이라기보다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았던 삶과 문화가 숨쉬는 공간이다. 그 안에는 관아도 있었고 민가도 있었으며, 학교도 있었고, 시장도 있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중앙에 집중되기 전에는 지방마다 고유한 문화가 읍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방도시는 읍성이 존재했던 읍치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읍성은 민중의 삶과 애환이 깊이 서려있는 곳

읍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백성과 통치자가 공존했던 곳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이자 민중의 삶과 애환이 깊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배자가 선정을 베풀던 시기에는 백성은 평안과 즐거움을 노래했다. 문화예술이 녹아들었던 현장이었다. 그러나 폭정이 일삼아 질 때는 읍성은 원망의 대상이며, 어느 경우엔 타도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읍성은 곧 관아가 있는 곳을 의미했다. 그래서 읍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곧 관아를 점령하고 통치에 반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전투를 치러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전국의 읍성 조직적으로 철거

하지만 지방 공동체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읍성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1910년 일본 통감부는 강압으로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고, 일본인이 그 책임을 맡아 전국의 읍성을 조직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다. 시가지 계획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읍성의 성벽은 철거됐고, 성돌은 하수도 바닥으로 쓰였다. 무너진 성벽 위로 간선도로가 신설되고 전차선로가 부설되었다. 해방이 되고 현대로 들어와서도 읍성 훼철은 이어졌다. 역사문화자원인 읍성의 보존이 도시개발에 장애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나마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는 읍성을 살펴보면 국가지정 15개소(사적 14개소, 중요민속문화재 1개소), ·도지정 25개소(시도기념물 18개소, 문화재자료 7개소)가 있다. 현존하는 읍성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 그리고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뿐이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한국의 3대 읍성이라 부른다.

동편제, 서편제, 그리고 중고제의 판소리
동편제, 서편제, 그리고 중고제의 판소리

일제강점기 민족 정서를 대변하던 판소리 크게 쇠락

하드웨어가 읍성이라면 동시대 같은 아픔을 겪은 소프트웨어가 있다. 우리의 전통 대중 예술인 판소리다. 씨름판, 판놀음, 판굿과 같이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의 의미가 담겨 있는 소리가 결합돼 만들어진 판소리. 판소리는 소리꾼이 북을 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춰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는 음악이다. 이때, 소리꾼은 흥을 돋우는 너름새를 섞어가며 인간의 여러 감정들을 으로 표현한다. 여기에 이야기의 흐름을 독백으로 들려주는 아니리가 가미돼, 독특한 우리 예술이 만들어진다. 전국의 읍성은 판소리의 무대였고 명창을 키워내는 산실이었다.

조선 숙조 때 등장한 판소리는 영·정조시대를 거쳐 조선 후기, 문화의 발달과 함께 부흥기를 맞는다. 이 당시에 판소리는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 등으로 유파와 창법이 다양하게 나뉘어 발전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민족 정서를 대변하던 판소리는 크게 쇠락하게 된다.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한을 대변해주듯 백성들은 임방울 명창의 쑥대머리를 즐겨 들었다. 춘양가중 옥중가 한 대목인 쑥대머리는 떠나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아픔을 노래하며 나라 잃은 슬픔을 대변했다.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

읍성과 판소리는 공동운명체처럼 긴 세월을 견뎌

읍성과 판소리는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를 품고 있다. 하나는 공간적 의미로 또 하나는 무형의 문화 콘텐츠로, 공동운명체처럼 긴 세월을 견뎌왔다. 사라지지 않고 버텼고, 살아 남았다.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124서산시내 베니키아 호텔에서 축성 600주년을 맞이하는 서산해미읍성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분석하고, 주민참여를 통한 서산해미읍성축제 발전과 축제 콘텐츠 개발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서는 서산해미읍성과 낙안읍성, 고창읍성의 유네스코 공동 등재 방안에 대한 공론화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전남 순천은 판소리 동편제의 시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순천 출신 송만갑은 근대 5명창에 포함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동편제 판소리 예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송순섭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순섭 명창은 현재 낙안읍성에 터를 잡고 동편제 판소리 법통을 잇고 있다.

낙안읍성에 동편제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면, 전라북도 고창읍성의 신재효를 빼고는 판소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아전 출신이었던 신재효는 판소리의 후원자이며 지도자로서, 이론가이자 논평가로서, 또한 수많은 단가와 잡가의 창작자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소리꾼들을 후원하고 가르치면서 구전되어 오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여섯 마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으며,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례를 마련함으로써 판소리를 광대들의 기예가 아닌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신재효는 80여 명의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장차 여류 명창의 출현을 예고했다. 신재효는 결국 판소리계에서 처음으로 진채선이라는 뛰어난 여성 명창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한편, 고창판소리박물관은 신재효 및 고창이 배출한 진채선 및 김소희 명창을 기념하고 판소리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신재효 고택 자리에 고창군 군립으로 건립해 2001년 개관했다.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에는 중고제의 예맥이 흐르고 있다. 중고제는 경기·충청지역에서 전승된 판소리를 일컫는다. 최초의 판소리 이론서라 할 수 있는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최초의 명창으로 최선달과 하한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최선달은 결성(홍성군) 사람, 하한담은 목천(천안시) 사람으로 판소리 발생기 최초의 명창은 물론 20세기 전반까지 충청지역에는 30여 명의 명창들이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활약했다. 이들은 서산·홍성·서천·공주·논산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며 인기를 누렸는데, 염계달·고수관·방만춘·정춘풍·한성준·김정근·김창룡·이동백·심정순·황호통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불렀던 충청도 판소리인 중고제를 중심으로 점차 판소리의 유파가 발생하고 동편제, 서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동편제, 서편제, 그리고 중고제의 판소리
동편제, 서편제, 그리고 중고제의 판소리

특히, 중고제 판소리 명창 중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 등이 서산 출신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심정순가()5대에 걸쳐 무려 7명의 국악명인을 배출한 국악명문가로 손색이 없다.

낙안읍성과 동편제, 고창읍성과 서편제, 서산 해미읍성과 중고제 판소리문화와의 결합읍성과 판소리문화를 키워드로 한 유·무형의 결합은 잃어버린 민족 유산의 부활이며,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한 또 하나의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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