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올해 8월 말 정년을 맞는 서림초등학교 류춘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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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올해 8월 말 정년을 맞는 서림초등학교 류춘자 교장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2.02 2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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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을 하면 조그만 화실 하나를 갖고 싶다
서산 서림초등학교 류춘자 교장
서산 서림초등학교 류춘자 교장

남편의 낙선이 결코 나쁜 것만 준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게 분신 같은 그림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서림초등학교 류춘자 교장

지난달 28일 점심시간을 갓 넘겼을 때 만난 교장실에는 류 교장이 직접 그린 대형 분홍장미 두 송이가 손님을 맞았다. 휴대폰에서는 연신 태풍급 강풍과 대설특보가 발효된다는 문자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날아든 날이었지만 약속된 시간을 어길 수는 없었다.

참 잘 왔다고 느꼈다. 잔잔한 목소리에 지난한 세월의 얘기를 들려주는 류 교장의 파란만장 스토리가 마치 그날의 일기예보가 마냥 마음을 흔들었다.

정치인 아내로, 세 아이의 엄마, 며느리, 그리고 교사와 화가로 살아가는 류 교장의 삶을 생각하며 당시 힘들 때는 어떻게 견뎠냐?”고 묻자 “1년 동안 남편과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다. 치유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그래도 행복이었다는 그녀에게서는 평안을 안겨준다는 꽃말의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비바람 속에서 간간이 눈발이 창가에 부딪혔다. 인생 60을 넘어 뒤안길을 돌아보는 류춘자 교장의 얼굴이 오늘따라 빨갛게 물들었다.

Q 어린 시절 얘기를 해달라?

어려서부터 우리 부모님은 교육만큼은 온전히 학교 선생님께라며 나를 그렇게 맡기셨고, 잔병치레와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늘 조용한 학생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비록 농사일로 학교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아버지께서는 매일 저녁 연필 세 자루를 정성껏 깎아서 필통에 넣어주셨고, 농사일로 힘드실 만도 한데 어려운 숙제가 있으면 함께 도와주실 만큼 상당히 자상한 분이셨다.

15남 중 장남인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셨지만, 밑으로 삼촌 세 분은 공주교대를 나와 교사로 근무하고 계셨기에 자식인 나 역시도 어련히 교대를 가야 하는 줄 알고 계셨다. 아버지 덕에 공주사대부고를 거쳐 교대로 진학했다.

물론 처음에는 상당히 고민했더랬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음악, 미술, 체육, 무용 등 예체능을 잘해야 하는데 음악에는 소질이 없고, 무용에는 흥미가 없고, 담임선생님께서는 교대를 나오면 오지로 발령받아 고생한다는 말씀도 하시고, 무엇보다 내 실력으로 더 나은 학교도 갈 수 있는데…….’ 어린 마음에 교대를 선택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과 동생 4명을 생각하면 그 길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또 없었다. 막상 입학하고 난 2년 동안은 어찌나 행복하게 교육대학생활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선택 하나는 참 잘한 것 같다

작품활동 모습
작품활동 모습

Q 첫 발령지와 그곳에서의 새내기교사 시절은 어땠나?

1979419일 남쪽에서부터 봄꽃 소식이 올라오던 날 나는 서산시 음암면에 있는 동암초등학교 5학년 담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성장의 시간을 맞았다.

우리 학교는 시내에서 7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당시는 시내버스에서 내려 20분 동안 진흙 길을 걸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자전거를 처음 배워 타는 것이라 넘어지고 다치기도 했지만, 여러 선생님과 함께하는 출퇴근길은 늘 재미있어 좋았다.

또 당시는 여교사가 그리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때문에 운동회 때가 되면 무용을 2~3가지씩 도맡아 하기도 했다. 몸치였던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연수를 다니며 무용을 배우기도 했고, 나름 창작하여 안무도 짜 아이들과 함께 멋진 작품으로 많은 칭찬을 받기도 했다.

새내기교사로서 좌충우돌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열정과 책임감으로 임했던 초임학교 시절, 그 학교를 떠날 때는 동료들과 아이들이 하나 되어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에는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던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201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2015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Q 시아버지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웃음). 동암초등학교 근무 당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남편을 소개받았다. 그땐 남편보다 시아버님 되시는 분이 더 나를 좋아해 주셨다. 당시 교장 선생님과 친분이 있으셨던 시아버님께서는 수시로 학교에 찾아오시곤 했는데, 가끔은 차로 나를 시내까지 태워다 주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참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19864, 나는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을 떠나던 그날,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아버님은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4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시면서도 늘 우리를 챙겨주신 아버님. 어느 날 병실에 있는 나를 불러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시고 소천하셨다.

2대 독자 남편은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와 시어머니, 당시 나이 어린 여동생 둘을 책임져야 하는 남편은, 설상가상으로 건설업을 하시다 갑자기 돌아가신 시아버님으로부터 부채도 이어받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결혼 후 5년 동안 죽어라 노력했고, 결국 우리는 채무 전액을 변제하며, 어린 시누이들도 대학을 졸업시키고 결혼까지 시키게 됐다. 그사이 감사하게도 슬하에 12녀도 태어나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이 모든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잘 돌봐주신 거라 생각한다. 지금은 13년 동안 한집에서 모셨던 시할머니는 오래전 아버님 곁으로 가시고, 시어머님과 우리는 현재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Q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여건대로 열심히 하고자 노력했다. 결혼하고 난 후 구세군 음암교회에서 신앙활동을 시작했다. 어느날 여사관님의 권유로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한글 공부 봉사를 했고, 후배의 부탁으로 충청남도교육청서부평생교육원에서 문해교육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평생동안 한글을 읽을 줄 몰랐던 분들이 시장의 간판을 읽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시내버스를 남의 도움 없이 탈 수 있어 너무 행복해 이불 속에서 울었다는 어느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눈물 흘렸던 기억도 난다. 또 교원 봉사동아리인 기쁨 두 배에서 지역아동센터 봉사에 참여하여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도 했다. 역시 봉사는 할수록 더 행복해진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폐교위기의 학교를 오고 싶어 하는 학교로 바꾼 일도 있었다. 20159, 초임지였던 동암초등학교 교장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1979년만 해도 7~800명이었던 학교가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폐교위기를 맞고 있는걸 보고 무척 가슴 아팠다.

안 되겠다 싶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학교, 그래서 오고 싶은 학교로 만들고자 두 손을 걷어붙였다. 차별화된 교육과정과 명품 방과후학교 운영, 특색 있는 교육활동, 참학력 증진을 위한 실천, 쾌적한 교육환경 제공 등으로 꿈과 끼를 키우는 행복한 배움터를 만들기 위해 동문과 지역사회 등 교육가족이 모두 힘을 모아 학교 살리기에 나섰다. 그 결과 이제는 모두가 찾는 행복한 학교로 만들어 놨다. 지금 생각해도 이 부분은 참 뿌듯하다.

2017년 개인전 열리기 전에
2017년 개인전 열리기 전에

Q 정치인의 아내로서 힘든 길에 들어섰다. 그때의 심정이 어땠는지?

남편은 당시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정치에 뜻이 있다며 퇴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고민과 갈등으로 숱한 밤을 뒤척였다. 정말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한편으론 대학교를 졸업하고 가족을 위해 하고 싶었던 꿈을 접었던 남편, 그것도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던 남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고민은 깊어만 갔다. 고1, 중3, 초등학교 5학년 자녀와 가정은 내가 맡기로 하고, 남편은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렸다. 시의원, 도의원, 시장출마 등 그가 가는 길을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응원하며 노력했다.

공무원이라서 도울 수 있는 방법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새벽에 나가는 남편에게 따뜻한 아침밥과 건강을 챙겨주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출근 전 새벽 인사, 퇴근 후와 주말에 시장과 마을회관, 행사장을 돌며 남편을 도와달라 호소했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당선이 되었을 때는 함께 기쁨을 나눴고, 시장선거에서 근소한 차로 낙선했을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상처 난 내 마음은 쉽게 아물지 못했다.

Q 화가로서 전시회를 가졌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나?

힘든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평소 하고 싶었던 그림을 이듬해 봄부터 시작하기 위해 고연희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분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그제야 조금씩 치유가 되는 걸 느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마음을 잡아준 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다 보니 운도 따랐다. 여러 공모전에도 출품하여 입상도 다수했고, 2015년도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입선도 했다. 그즈음, 아픔으로 구멍 난 가슴이 조금씩 메꿔나갔다.

2012년도부터 꾸준히 회원들과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7년에는 많은 분의 사랑과 격려 속에 개인전도 가지게 됐다. 그림은 마음을 나타낼 수 있어 좋다. 나는 내 그림이 많은 분에게 따뜻함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Q 올해 퇴직을 하는데 인생 2막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퇴직을 하면 조그만 화실 하나를 갖고 싶다. 그곳에서 그동안 살아온 교직의 길도 되돌아보고, 여유를 가지면서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 지인들과 함께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지며 행복을 나누고 싶다.

지금도 나는 사이버대학교 예술치료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 배움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이웃과 가족을 생각하며 내 인생 2막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그려나갈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자유롭게 뛰어놀며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나이인데 답답한 곳에 갇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안쓰럽다코로나19로 학교 생활수칙을 잘 지켜준 우리 아이들과 선생님, 학부모님들 모두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내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류춘자 서산 서림초등학교 교장.

“1학년은 입학식도, 6학년은 졸업식도 비대면으로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아이들이 제일 기다리는 수학여행과 체험학습도 사라진 해!, 체육대회, 운동회 등등 볼 수 없었던 한 해였다며 코로나19가 아이들의 다리를 붙잡고 있어 어른의 한사람으로 미안할 따름이라는 류 교장은 교장실 창가로 비치는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디 3월에는 운동장 가득 학생들이 모여도 전혀 걱정 없는 안전한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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